<서평>
송방송 박사의 '한국근대음악인사전'(서울: 보고사, 2009)
김 창 욱
음악학자 송방송 박사(한국음악사학회 이사장)는 누구나 필요한 일이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서 행하기 어려운 작업을 오랫동안 수행해 왔다. 음악연구의 기초자료를 수집․분류․정리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일찍이 음악기초자료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간파한 그는 이미 '한국음악학논저해제'(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로부터, '조선왕조실록음악기사총색인'(서울: 국립국악원, 1991), '한국음악학논저해제 Ⅱ'(서울: 민속원, 2000), '경성방송국국악방송곡목록 색인'(서울: 민속원, 2002), '한국음악학논저해제 Ⅲ'(서울: 민속원, 2003), '한국근대음악사료색인집: 문헌자료편'(서울: 민속원, 2005), '한국음악학논저해제 Ⅳ'(서울: 민속원, 2007)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자료집을 잇따라 펴냈다.
지난 한해만 해도 그는 '한국근대음악기사자료집' 색인편(서울: 민속원, 2009)에 이어, '한국근대음악인사전'(서울: 보고사, 2009)도 아울러 발간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마땅히 음악자료집의 ‘달인’(達人)이라 할 만하다.
최근에 나온 '한국근대음악인사전'은 근대 초기, 즉 1900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한국의 음악가 약 5,000명을 수록하고 있다. 624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인명사전에는 이 시기 모든 음악가를 망라하고 있다. 제도권내 음악가는 물론, 권번(券番) 출신의 기생가수, 유행가 작곡가와 작사자, 심지어 한국 음악가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외국 음악가까지 포괄한 것이 그 예이다. 더욱이 가나다순으로 배열한 인명 근처에는 해당 인물사진을 배치하고 있는데, 무려 1,000여 장에 이른다. 특히 이들이 흔치 않는, 당대의 귀중한 인물사진이라는 점에서 사전으로서의 가치를 한층 드높인다.
저자가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같은 인명사전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작업해 온 주제색인에 힘 입은 바 크다. '매일신보'․'조선일보'․'동아일보'의 음악기사 색인을 비롯, '경성방송국국악방송곡목록색인'․'한국근대음악사료색인집'․'조선미인보감: 색인' 등이 그것이다. 이같은 신문과 잡지, 음반 등의 자료를 통해 마침내 만들어진 사전은 무엇보다 사실(事實) 위주의 객관성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긍정적이다.
더구나 이 사전은 각 항목마다 저자가 참고한 문헌목록이 세세하게 붙여져 있다. 가령 저자는 '한국작곡가사전'(Han'guk chakkokka sajŏn)을 ‘HCS’로, '한국근대음악기사자료집'(Han'guk kŭndae ŭmak kisa charyochip)을 ‘HKUC’와 같은 형식으로 줄여서 표기하고, 참고한 자료집의 쪽수도 면밀하게 달아놓았다. 저자의 정치(精緻)한 학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전의 한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신문과 잡지 등의 대중매체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여기서 누락되거나, 혹은 잘못된 사실이 그대로 등재된 점이 그러하다.
가령, 34쪽의 ‘강신명’(姜信明)의 경우 ‘선천(宣川) 거주 문사(文士)’로 수필집을 냈다는 사실만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평양신학교․일본신학교․프린스턴신학교 등에서 수학하고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목사이자, 동요 100여 편을 만든 작곡가이기도 했다.
또한 68쪽의 음악평론가 김관(金管)의 경우 출신지나 출신학교 등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한국음악협회가 펴낸 '음악연감'(1966)에 따르면, 그는 개성(開城) 출신으로 니혼(日本)대학 예술과를 졸업하고 1950년 서울에서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 더구나 그는 일제 말 “동아의 신정세와 음악문화의 재출발”(매일신보 1940년 7월 7일자 4면), “국가의 신체제와 신음악 건설”(매일신보 1940년 9월 21일자 4면) 등의 친일적 경향이 강한 음악논설을 썼는데, 누락되어 있다. 이것은 홍난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모리카와 쥰’(森川 潤)이라는 창씨명으로 “지나사변과 음악”(매일신보 1940년 7월 7일자 4면)을 쓴 바 있다.
아울러 ‘홍난파’는 집안에서 출현한 서양음악가들, 즉 재후․재유․은유․성유․지유 등과의 상관관계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재유와 은유의 본업은 의사). 왜냐하면 근대시기 홍난파 가계(家系)에서 이처럼 많은 양악가(바이올린 연주자)들이 등장한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일 뿐더러, 초창기 음악계에서 이들은 난파와 선후배․동료․사제관계를 줄곧 유지하며 연주활동을 벌였던 까닭이다.
578쪽의 홍재후(載厚)는 난파의 8촌형(15살 위)이고, 574쪽의 홍재유(洪載裕)는 난파의 친형 홍석후(洪錫厚)의 장남(5살 아래)이며, 574쪽의 홍성유(洪盛裕)는 홍석후의 삼남(10살 아래)이다. 그 밖에 홍석후의 차남 은유(恩裕, 8살 아래)와 4남 지유(志裕, 15살 아래)도 존재했지만, 사전에는 누락되어 있다.
홍은유(1906년생)는 난파와 재유․성유와 함께 1927년 ‘아희생활사’ 창간1주년 기념음악회(3.19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 참여한 바 있고, 홍석후의 막내 아들이었다가 이후 난파의 계자(繼子)가 된 홍지유(1913년생)는 1935년 조선일보 주최 ‘재동경 조선음악가 고토방문순회음악회’, 1941년 조선교향악단의 ‘오케음악무용연구발표회’, 1941년 조선음악협회의 ‘음악보국대연주회’ 등에 참여한 바 있다. 특히 은유와 성유는 1922년 9월 난파가 창설한 연악회의 제1회 수료생이었고, 성유는 난파의 동경고등음악학원 1년 후배이자, 1933년 6월에 조직된 난파트리오의 일원이었다.
한편 '한국근대음악인사전'에서는 다소 적확(的確)하지 않은 부분도 엿보인다.
44쪽의 ‘계정식’(桂貞植)이 ‘우르즈부르그음악학교’를 마쳤다고 기술했는데, 그것은 ‘뷔르츠부르크’(Würzburg)로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572쪽의 ‘홍난파’ 항목에서 ‘동경고등음악학교’(東京高等音樂學校)는 ‘동경고등음악학원’(東京高等音樂學院)의 오기이다. 또한 90쪽의 ‘김문보’(金文輔)가 ‘일본 상야(上野)음악학교’를 졸업했다고 썼는데, ‘상야’는 학교명이 아니라, 도쿄에 위치한 지역명이다. 즉 학교가 우에노(上野)에 있다고 해서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이것은 ‘동경음악학교’라고 표기해야 옳다. 357쪽의 ‘윤심덕’(尹心㥁) 항목에서도 똑같은 수정이 요청된다.
또한 곡명은 따옴표나 꺽쇠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불필요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가령 572쪽의 곡명에는 겹따옴표를 쓰고(“봉선화”․“골목대장”), 곡명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572쪽에서는 아무런 약물(約物)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녹슨 가락지․방아 찧는 색시의 노래․병정나팔…).
그 밖에도 61쪽 ‘금수현’의 경우 한자명(金守賢)이 없으며, 587쪽 일본인 ‘히라마 분주’(平間文壽)는 ‘평간문수’(平間文壽)로 가보라고 표시하고 있지만, 표시대로 가봐도(546쪽) ‘평간문수’ 항목은 찾을 수 없다. 비록 부분적이고 미세한 오류들이겠으나, 이들은 향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함으로써 차츰 보완될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사전의 완성도를 높이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1977년 해외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귀국하면서 두 가지 꿈을 가졌다고 고백한다. 하나는 쉽게 읽히는 한국 음악사를 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 교양인을 위한 음악사전을 편찬하는 것이었다. 저자의 첫 번째 꿈은 '증보 한국음악통사'로 이미 이루어진 터이고, 이번에 나온 '한국근대음악인사전'을 통해 그는 두 번째 꿈을 비로소 성취한 셈이다.
한국 음악가를 대상으로 한 사전은 지난 199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가 펴낸 '한국 작곡가 사전'(Ⅰ)과 '한국 작곡가 사전'(Ⅱ), 그리고 1997년 같은 곳에서 편찬한 '한국 작곡가 사전'(Ⅲ)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보급판이 아니었던 까닭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이들은 1999년 '증보 한국 작곡가 사전'(시공사)이라는 타이틀로 합본, 정식 출판되었다.
이 사전에는 약 1천 명에 이르는 한국 작곡가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1939년 이전에 탄생한 국내 및 월북․해외동포 작곡가까지 포함되어 있다. 더구나 생존 작곡가의 경우 이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생생한 기록을 자료화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사전은 제목에서와 같이 한국 ‘작곡가’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 그리고 작곡가 중에서도 대중가요 분야의 종사자들은 ‘일단’ 대상에서 제외시켰다는 점 등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이번에 나온 송방송의 '한국근대음악인사전'은 그 대상이 매우 포괄적이다. 전통음악은 물론, 서양음악과 대중음악 영역까지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명실공히 한국 ‘음악가’ 사전이라 할 만하다. 이 사전이 음악연구자들, 나아가 교양음악인들에게 널리 참고될 수 있기를 충심으로 기대해 마지 않는다.
'음악과 민족' 제39호(부산: 민족음악학회, 2010), 369-3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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