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부산음악비평의 현황과 과제

浩溪 金昌旭 2011. 7. 12. 08:50


부산음악비평의 현황과 과제

  

김 창 욱 

 

   음악비평이란 새로운 작품 및 연주실제에 대해 미적․양식론적․사회적 기준에 따라 행하는 질적인 평가를 뜻한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음악비평은 부산의 경우, 광복 이후부터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1. 광복 이후 부산의 음악비평

 

   광복 이후 음악비평은 연주평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 밖에 시론․시평 등의 음악 관련글도 더러 있었다. 그 가운데 문헌상 최초로 나타난 음악비평으로는 홍일파(洪一波, 본명은 洪志英)의 시평 「無爲의 一年, 己丑年 港都樂壇 回顧」를 꼽을 수 있다. 남성여고 영어교사였던 홍일파는 성악과 음악이론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이 글은 1949년 부산지역에서 벌어진 음악활동을 개관(槪觀)․작곡계․평론계․결론 등으로 구분, 비교적 구체화시키고 있다. 이 가운데 ‘평론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評論界】音樂評論은 音樂家가 써야 하는 것이다. 어중이 떠중이 門外漢이 가냘핀 솜씨로 몃 마디 적어내는 것마저 評論이라 하여서 여기에 問題視하여 論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동안 '文藝新聞' 紙面을 通하여 '노래하자會'의 오늘을 豫言한 金點德氏의 評論과 금수현氏의 抗辯이 하나의 波紋을 던젔을 뿐 아무런 筆舌을 보지 못한 채 한 해가 저물고 만 것이다.

 

    글은 이 시기 부산에서 활약한 평론가로 김점덕(성악)과 금수현(작곡)이 존재했으나, 그 밖에 주목할 만한 평론가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5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전쟁기 임시수도 부산의 음악비평활동은 비교적 활기를 띠었다. 박영의 「政訓樂隊 演奏를 듣고」, 윤용하의 「樂壇一年 回想記」, 이민광의 「軍樂과 戰爭」, 임원식의 「安易性의 超克」, 김상화의 「陸軍交響樂을 듣고」, 윤이상의 「앤더슨孃에게」 및 「瀕死한 藝術家」 등이 발표되었다. 특히 해군장교였던 박영의 「政訓樂隊 演奏를 듣고: 方法과 高度化를 爲하여」는 그동안 연주회의 인상비평에서 다소 벗어나 본격비평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작곡가 윤용하의 「樂壇一年 回想記」는 아동음악과 음악교육의 중요성에서부터 방송음악의 효율적인 운용방법, 창작음악계와 음악출판계의 문제점을 두루 지적하고 있다. 그 가운데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의 「앤더슨 孃에게: 당신의 靈歌는 당신의 피」라는 서간체 형식의 공연평과 「瀕死한 藝術家: 蔡東鮮씨의 작고에」라는 추도사는 전쟁 시기 한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연 돋보인다.

   그는 「앤더슨 양에게」에서 흑인 알토가수 앤더슨의 영가에 묻어나는 슬픔과 전후 한국 민족의 슬픔을 일체화시켜 두 민족의 동질감을 자아내고 있는가 하면, 문장 곳곳에 당대의 아픔을 통렬히 토로하고 있다. 예컨대 “여기 전쟁고아가 얼마나 있는가. 정든 고장과 전래의 양습을 빼앗긴 늙은 부모와 먹기에 풀조차 군색한 농민들이 얼마나 굶주리고 있는가? 또 얼마나 많은 이땅의 순박하고 어진 젊은이들이 어느 나라의 짐승보다도 뭇한 식료로써 견디며 전선에서 원수와 마주 서고 있는가”에서처럼 이 무렵 윤이상이 한민족의 비극적 현실에 얼마만큼 고뇌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그는 「빈사한 예술가」에서 굶주림에 못이겨 삶을 마감한 당대 엘리트 작곡가 채동선을 통해서 당시 암담했던 한국의 현실을 탄식하고 있다. 채동선은 “사변 후 표연히 부산으로 내려와 … 살기 위해 한때 부두에서 그의 체력에 과중하게 육체노동을 했”고 “그의 가족이 부두에서 담배행상을 했”다. “검은 무명한복에 대추씨같이 마르고 곧은 체구”였던 그는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통렬히 민족의 운명을 논하고 문화정책의 경륜을 토로하곤 했”다. “그리 곤란했어도” 그는 “남의 추잡함을 보곤 못 참”았다. 그는 “단시일에 병명이 여럿으로 이동한 후 급기야는 작고하고” 말았는데, 그 직접적인 사인은 “못 먹어서 괴로웠고 괴로워서 병 났고 병으로 쇠진해 가는 육체를 지탱할 영양을 주급치 못”할 만큼 빈한했기 때문이었다.

 

 

2. 한국전쟁 이후의 부산음악비평

 

   한국전쟁이 끝난 50년대 중반부터 부산음악비평은 양적으로 점차 풍성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50년대 말 오태균․유신․하규한, 60년대 오태균․유신․이상근․금수현․고태국․하규한․제갈삼, 70년대 김창배․김광일․이상근․오태균․유신․제갈삼․임종길․안일웅, 80년대 이언도․안일웅․임종길․곽근수․김광일․오태균․정원상 등이 비평분야를 주도했고, 비평장르도 서양음악분야의 창작․독창․독주․실내악․관현악․오페라, 전통음악분야의 연주 등으로 다변화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비약적인 비평활동을 한 음악인으로는 오태균․김창배․유신․김광일․이언도․이상근․임종길․안일웅 등이었다. 지휘자 오태균은 부산합창단 공연, 김점덕 독창회, 정에스더 문하생발표회, 김성수․하우스만 피아노독주회, 김호현 바이올린 독주회, 부산시립교향악단 정기공연, 뉴 부다페스트 현악4중주단 공연, 오페라 「사랑의 묘약」․「라보엠」․「리골레토」 공연, 성악가 김창배는 박홍조․배행숙․전경애 독창회, 파리나무십자가합창단․빈소년합창단․브니엘소년합창단 공연, 포이에르링 피아노독주회, 부산시향 정기연주회, 부산실내악단 창단연주회, 오페라 「나비부인」․「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피가로의 결혼」․「대춘향전」․「춘희」 공연, 작곡가 겸 평론가 유신은 피바디합창단 공연, 임만섭․김천애․에스더하인즈․정봉옥 독창회, 김금헌 클래식기타 연주회, 부산현악4중주단 공연, 부산시향 서울초청연주회, 부산트리오 서울연주회, 오페라 「피델리오」․「돈 죠반니」 공연 등의 연주에 대한 평을 썼다.

   또한 작곡가 김광일은 향신회 작곡발표회, 재부 성악가 11인 연주회, 전국소년소녀 합창제, 조현선 피아노독주회, 부산실내합주단 공연, 부산시향 정기연주회, 부산교육대학 현악합주단 창단공연, 멜버른 심포니 부산공연, 오페라 「토스카」․「부산성 사람들」 공연, 이언도는 부산시향 정기연주회, 신수정․이종영․이종숙 피아노트리오 연주회, 부산실내합주단 정기연주회, 앙드레나바라 첼로독주회, 오페라 「나비부인」․「전화」 공연, 이상근은 크라우스 피아노독주회, 부산시향 정기연주회, 김자경오페라단 부산공연, 임종길은 부산시립합창단․부산시향 정기연주회, 건전가요합창경연, 서울소년소녀교향악단 부산공연, 부산사대 교수음악회, 영국 로열필 오케스트라 공연, 울산교향악단 창단연주회, 오페라 「부산성 사람들」 공연, 작곡가 겸 평론가 안일웅은 이영자 독창회, 서심미 피아노독주회, 부산관현악단 창단연주회, 부산시향 정기연주회 등에 대해 각각 비평문을 발표했다. 이러한 연주중심의 음악비평은 1973년 부산시민회관, 1983년 경성대 콘서트홀, 1988년 부산문화회관이 잇따라 개관됨으로써 음악공연 횟수가 급격히 증가함과 동시에 비약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 기간의 음악비평은 전문평론가의 부재에 따라 독자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음악내용의 깊이 있는 분석이라든지 음악가의 새로운 비젼 따위도 명확히 제시되지 못했다. 작곡․성악․관현악을 전공한 음악인이 평단의 주류를 이루었고, 전문평론가로는 유신․곽근수․안일웅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대부분의 비평문이 매우 직선적이고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비평의 순기능 보다 오히려 역기능을 초래하기도 했는데, 가령 평자의 판단과 그 연주가의 곡해석이 많지 않을 경우 “그 곡의 해석은 잘못되었다”, “형편없는 연주였다”, “피아노 치는 자세가 틀렸다”, “그런 음악이 아니다” 등의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다. 비평에 사용된 어휘에 있어서도 “아쉬움이 있는”, “매우 격조높은”, “침착하고 안정된”, “설득력이 있는” 따위나 “~은 좋았으나, ~은 아쉽다”와 같이 고정적인 문장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 성격에 있어서도 칭찬 반, 비난 반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씌어졌다.

 

 

3. 음악비평이 본격화된 1990년대 이후

 

   부산음악비평이 본격적인 전문평론시대를 열게 된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이전에 비평계를 주도했던 유신․곽근수․안일웅에 이어 신설령․김원명․정영진․최필선․서우선․김창욱․윤소희 등 젊은 비평가들이 잇따라 출현, 비교적 활성화되었다. 특히 부산대 경제학과 및 서울대 대학원에서 음악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한 김원명은 90년대 초부터 평론을 써오다 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예술지원정책에 관한 경제학적 고찰」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고, 동아대에서 음악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김창욱은 90년대 중반부터 신문 및 잡지를 통해 꾸준히 비평활동을 꾀했다.

   97년 이후, 김원명은 김상곤․김주희․남성성악가앙상블․부산성악아카데미․부산시향․부산실내악축제․아시안유스오케스트라․아트심포니오케스트라․울산시립합창단․그랜드오페라단에 대한 연주평과 건전한 청소년문화, 대학음악교육 개혁, 문예진흥기금 운영, 부산문예진흥원 설립, 부산문화회관의 민간위탁, 부산음악비평문화, 부산시립예술단 구조조정, 서울중심의 음악구조 탈피, 예술경영의 도입 등에 관한 시론, 97-99년의 부산음악계 상황에 대한 시평, 이창룡․하순봉에 관한 음악가론, 안일웅 작곡발표회의 창작평 등 광범위한 논의를 시도했다.

   또한 김창욱은 라메르필하모닉오케스트라․모스크바심포니오케스트라․부산합창제․부산 및 가람신인음악회 등에 대한 연주평, 부산창작음악계의 현실, 부산시 문화예술행정의 개선점과 대안, 대중화시대 예술음악의 전망, 청중의 문제, 일본 대중음악 개방에 따른 논의 등과 같은 시론, 이건용의 「들의 노래」에 대한 음반평, 송방송의 '한국음악학의 방향'에 대한 서평, 1996-2000년의 부산음악계 쟁점을 살핀 시평, 이상근의 오페라에 대한 작품론, 황장수․최석태의 작품에 대한 창작평 등 음악비평의 폭과 깊이를 더 한층 심화시켰다.

   나아가 이들은 음악비평집을 잇따라 내기도 했다. 김원명은 2001년에 '경제사회와 음악', 2003년에 '연주와 비평'을 냈고, 김창욱은 2000년에 '부산음악의 지평', 2006년에 '나는 이렇게 들었다'를 펴냈다.

   김원명의 '경제사회와 음악'에는 음악을 둘러싸고 있는 제반 사회현상은 물론, 창작평․연주평․시평 등의 음악비평, 20세기 끝자락에 살고 있는 한 평론가의 시각이 담겨 있고, 예술경영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에 대한 논문 등이 실려 있다. '연주와 비평'에는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썼던 연주평과 부산시립교향악단의 활동에 대한 비평, 그리고 그 밖의 시평 등이 게재되었다.

   또한 김창욱의 '부산음악의 지평'에는 1990년대 중반부터 써 온 공연평․시평․시론․창작평․서평․논문 등이 실렸는데, 대부분 부산지역의 음악과 음악사회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들었다'에는 2000년 이래 부산음악계 상황을 알 수 있게 하는 시론․시평․서평․창작평․음악가론․논문․번역문 등이 게재되었다.

   이들은 글의 갈래에 따라 성격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 초점은 ‘여전히’ 부산의 음악과 음악사회에 맞춰져 있다. 지역음악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1990년 이후, 부산음악비평은 크게 학문성․지역성․다양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첫째 학문성은 단순히 음악사회의 주장이나 여론의 충실한 반영에 머물지 않고, 음악학전공 비평가로서 충분한 자료와 논리적 근거를 바탕해서 비평함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 지역성은 그동안 중앙집권적 문화로부터 소외되었던 부산지역 음악문화의 주체성 회복의 지향을 뜻하는 것이며, 셋째 다양성은 부산의 예술음악․전통음악․대중음악은 물론, 창작․연주․음악사회․음악문화와 같은 비평내용, 시평․시론․창작평․서평․음반평․비평적 논문 등 비평형식이 괄목할만큼 다변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4. 부산 음악비평계의 과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음악비평의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창욱의 “97년 부산음악문화의 통계적 분석”에 따르면, 당해 예술음악 연주회만해도 340회를 상회함에 비해 발표된 전체 비평편수가 모두 71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극히 미미한 수치이므로 비평공간의 대폭적 확대를 요청하고 있다. 또한 비평의 유형에 있어서 연주평․시론․시평이 대부분을 차지하므로 비평의 범주를 보다 광범위하게 개척할 필요가 있으며, 특정 소수에 의해 주도되는 비평문화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비평가가 개발되어야 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의 몇 가지 문제점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 부산음악계 곳곳에서는 “왜 비평이 없는가?”, 혹은 “왜 비평다운 비평이 없는가?”라는 불만과 질타의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오고 있다.

   비평에 대한 불만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 하나는 독자적인 음악비평 영역이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산에는 월간 음악전문잡지가 없다. 비평가가 글을 발표할 장이란 겨우 몇몇 일간지에 불과하다. 지면이 적다는 것은 비평가의 행동반경이 그만큼 좁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다양화된 비평문화의 형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인 동시에, 다수의 비평수용자가 소수의 비평제공자를 은연중에 무시하고 왜곡하려는 풍토를 낳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비평가의 수고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비평을 위해서는 비평가가 다수의 음악회에 참석하고, 전체의 흐름 속에서 그 음악회의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만큼 음악비평은 상당한 노력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그러나 비평은 생계가 보장되는 ‘직업’이 아니며, 자칫 하다가는 오히려 음악인 사이에서 필화(筆禍)를 자초하기 일쑤다.

   따라서 제도권 대학 내에 음악비평 전공 개설, 음악비평가 그룹의 조직화, 신예 비평가 양성을 위한 교육사업 및 우수 비평가를 위한 음악비평 콩쿠르 개최 등을 통해서 음악비평의 사회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문화예술단체 평가, 문화예술지원사업 심의 및 평가, 지역문화회관 기획 및 운영 평가, 지역축제 평가 등 다양한 평가사업에도 적극 나서야 할 시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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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예술문화비평' 창간호(2011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