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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10월20일홍파동에새집을짓고나서부인이대형과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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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막염! 이 말은 내 귀를 내 마음을 적지 않게 놀라게 했습니다. 늑막염쯤으로야 설마 허무하게 죽기까지야 하랴 하는 생각은 가졌지마는 내 병이 사실로 늑막염이라면 하루 이틀에 졸연히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매 몹시도 귀찮게 생각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날 저녁부터는 제법 중병 환자처럼 약병도 머리맡에 놓고 체온기며 찜질할 물주머니 같은 것도 준비를 한 다음에 넉넉잡고 일주일 앓어 볼 작정으로 배포를 차리고 누웠습니다....”
홍난파는 잡지『신가정(新家庭)』1934년 11월호에 늑막염에 대해서 위와 같이 기록하였는데, 이는 미국 유학시절 자동차 사고로 늑골을 다친 일이 있었으며 귀국 후에 재발하여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또한 홍난파는 1937년 6월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어 고문을 받는 중에 늑막염이 재발되어서 고생하였으며 1941년에 병이 악화되어서 4월에는 적십자병원에 입원을 하였으며 다시 위독하게 되자 7월 15일 경성요양원(현재 서울 위생병원)에 입원하였으나 7월 25일 퇴원을 하였으며 8월 30일 오전 11시에 홍파동 자택에서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 돌아가시게 된다.
그는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火葬)해 달라.”고 하였으며 9월 1일 새문안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당시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였다.
나비 넥타이에 메꼬 모자를 쓰고 깔끔한 옷차림의 단장을 짚고 걸어 다니는 멋쟁이 신사 홍난파, 우울한 날이면 하루종일 말 한마다 하지 않다가도 일단 기분이 풀리면 기발한 해학과 유머로 좌중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 넣기도 하였던 홍난파, 시간을 여유있게 안 가져서 바삐 아침식사를 하고 숭늉은 현관에서 마셨으며, 나이트 캡을 쓴 채 학교를 가기도 하였던 홍난파, 워낙 식성이 좋아서 처음 일본에 갔을 때에 하숙집에서 주는 공기 밥을 아홉 그릇이나 먹어 치우자 다음날 아침에 하숙집 주인이 “좀 나가 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을 듣기도 하였던 홍난파는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영원한 연주여행을 떠난 후에 많은 친구들과 지인들이 회상하던 그의 생전의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홍난파가 말년에 음악활동을 하던 시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잃고 일본은 한반도를 중국 대륙의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어 우리 민족에게 극악한 탄압을 하던 암흑기였으니 비록 식민지 조국이라도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내 땅에서 살고 국외에 나가서 살지는 않겠다던 홍난파는 일제에 협력하는 일부 행위를 하게 된다. 당시 신문에 음악보국운동에 용왕매진하여야 한다는 글을 쓰기도 하고 춘원이 작사하고 그가 작곡한 곡의 가사가 일부 일제를 찬양하기도 하였으니 이를 매우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홍난파는 예술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외국으로 도피를 선택하기 보다는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가난한 식민지 조국에서 어려운 가운데 자신의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며 아울러 서양음악을 우리에게 전해준 선구자였다.
홍난파의 일부 친일 활동에 대해서 음악학자 김창욱(金昌旭) 박사는 최근에 집필한 저서『음악학총서17-나는 이렇게 들었다』에서 “그러나 그의 친일음악활동은 자발적이라기 보다 일제에 의한 탄압의 결과였다. 총독부는 그가 근무하던 이화여전ㆍ빅타 축음기회사ㆍ경성보육학교를 차례로 그만 두게 했고, 그의 사상 전향을 위해 70일 이상 감옥에 가둬 모진 고문을 서슴치 않았다. 그것은 미국유학시절 자동차 사고로 얻은 건성늑막염을 재발시켜 마침내 그를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게 했다. 홍난파가 그런 불행한 죽음을 당한 것은 일제시대를 통틀어 그는 이미 조선 최고를 구가하던 ‘원로’ 음악가였고, 그런 그는 조선총독부의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홍난파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이고 우리는 왜 홍난파를 기리는가? 홍난파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호에 계속된다.
신도성(경기도음악협회 난파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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