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부산』 2015년 2월호(통권 제116호)
“큼직한 두 팔과 발, 거대한 어깨와 넓적다리, 그의 손은 너무나 두툼해서 뼈마디는 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길쭉한 얼굴은 말대가리를 닮았고, 나이가 들면서 더욱 뚱뚱해져 마치 식육용 수소같이 보였다.” 헨델에 대한 로맹롤랑의 인상기다. 위의 초상에서 그의 풍만한 이미지가 잘 드러난다.
다만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바로 그의 헤어스타일이다. 파마를 한 듯한 곱슬머리가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려져 있다. 그것은 짧으면서 단정한 ‘아버지’ 바흐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것도 어쩌면 그러한 이유에서였는지 모른다.
바흐와 동갑나기, 바로크시대 쌍벽 이뤄
헨델은 1685년에 태어났다. 바흐와는 동갑나기였고, 둘의 출신지(독일)도 같다. 바흐가 아이제나흐에서 귀가 빠질 무렵 그는 할레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헨델은 1750년 바흐가 죽고 난 뒤에 9년이나 더 살았다.
헨델의 음악은 단순명쾌한 선율과 화성으로 씌어졌다. 특히 그의 이탈리아적 화성음악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양식이다. 독일적 다성음악을 썼던 바흐보다 그의 음악이 훨씬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또한 그의 음악은 대부분 거대하고 풍부한 음향을 효과적으로 썼다. 칸타타·오페라·오라토리오에서 웅장하고 장대한 합창과 관현악이 잇따라 동원되었다. 그것은 불특정 다수의 대규모 청중을 고려했던 까닭이었다.
평생 독일땅을 떠나지 않았던 꽁생원 바흐와는 달리, 헨델은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 유럽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 독일의 함부르크·뒤셀도르프·드레스덴·베를린·하노버·아헨은 물론,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로마·나폴리·베니스 등지였다. 그러나 마당발이었던 그는 여기서 머무르지 않았다. 27살의 한창 때였던 그는 런던으로 건너가 아예 영국으로 귀화하고 말았다. 영국인 헨델은 죽을 때까지 무려 47년 간이나 그곳에서 살았다.
헨델은 바흐와 함께 바로크를 수놓았던 작곡가다. 하지만 음악가 가문의 소생이었던 바흐와는 달리, 헨델의 집안은 음악과는 전혀 무관했다. 할아버지 발렌틴은 금 세공업자로 처음 할레에 정착했고, 아버지 게오르그는 그곳 궁정 이발사 겸 외과의사였다. 어머니 도로테아 파우스트 또한 루터파 교회 목사의 딸로 독실한 크리스찬이었을 뿐 음악에 유별난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집안 사람들 모두 음악이란 오락이나 위안거리로 여길 만큼의 순진무구한 음악관을 갖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당대 바흐와 쌍벽을 이룰 정도의 명성을 쌓은 헨델의 출현은 모름지기 돌연변이가 아닐 수 없다.
1702년,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 할레대학 법학과에 등록한 헨델은, 그러나 특정한 과목을 전공하겠다는 뜻이 없었다. 감성적인 그에게 딱딱한 법학은 애당초 어울리지 않았고, 그는 곧장 음악으로 전향했다. 할레성당에서 오르간 주자로, 돔교회나 슐로스 성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 활약하면서 그는 연봉 50탈러와 하숙비를 제공 받았다. 나아가 바이올린과 오보에와 같은 여러 다양한 악기연주법을 배우는가 하면, 특히 오르간 즉흥연주에서 출중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다성음악, 즉 푸가와 대위법에 능했던 그는 바흐와 마찬가지로 선배 작곡가들의 작품을 사보하면서 작곡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할레의 오르간 주자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18살 때 함부르크로 가서 그곳 오페라극장에서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연주했다. 여기서 그는 3년 쯤 머물렀다. 그러다 21살이 되면서 그는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독일 다성음악에 능한 그였지만, 이탈리아적 선율이나 화성음악 작곡은 아직 약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뒷배가 되어줄 후원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탈리아가 이같은 그의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명문가와 귀족, 고위 성직자와의 친교
헨델은 먼저 플로렌스에서 그 유명한 메디치가(家)와 인연을 맺었다. 메디치가는 평범한 중산층 집안이었으나, 은행업의 사업확대와 교황청과의 거래로 막대한 부를 쌓은 가문이다. 이를 기반으로 상당수 메디치가 출신들이 정계에도 진출했는데, 이들은 귀족에게 유리한 세금제도를 철폐하고 평민들도 이익이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일대 혁신을 가했다. 더구나 메디치가는 인문연구와 문예부흥을 적극 장려함으로써 마침내 르네쌍스가 열리게 되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부유한 가문,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와 긴밀한 친교는 다분히 헨델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로스포리 공, 오토보니 추기경과도 매우 가까이 지냈고, 로마에서는 음악가와 시인들의 사교모임에서 스스로를 자주 노출시키려 애썼다. 자신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시간과 진리의 시간」을 연주한 것도 그래서였다.
나폴리에서는 알비토 공작의 결혼식을 위해 「세레나데」를 작곡해 주었고, 베니스에서는 자작 오페라 「아그리피나」를 공연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음악이론가 요한 마테존이 “화성과 선율이 그렇게 밀접하고 힘 있게 서로 결합된 적이 없었다”고 찬탄한 바도 있다.
1710년, 헨델은 하노버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것은 이후 새로운 삶을 위한 예고였다. 1712년 헨델은 영국으로 건너갔다. 런던에서 그의 오페라 「리날도」 공연이 대성공을 거두게 되자, 그는 여기서 이후의 음악적 성취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았다. 이제 그는 영국 왕실과 긴밀하게 교류했고, 항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당시 그는 조지 1세가 영국의 왕위에 오르자 「수상음악」을 작곡·연주했고, 조지 2세의 대관식 때는 「대관식 앤덤」을 작곡·헌정했다.
왕실의 후원을 얻은 그는 왕립음악원에서 오페라 작곡가로도 눈부신 활약상을 보였다. 여기서 그는 「로타리오」·「파르테노페」·「소자르메」·「오를란도」·「크레타의 아리아드네」 등의 오페라를 썼다. 그러는 동안 그는 매년 음악원으로부터 꼬박꼬박 연금을 지급 받았다. 1713년 앤 여왕 때 200파운드의 연금이 이듬해 1714년에는 두 배에 이르는 400파운드로 인상되었고, 공주들의 음악교습을 맡으면서부터는 600파운드로 늘어났다. 심지어 1929년에는 연금이 1,000파운드까지 치솟았다. 헨델은 마침내 런던에서의 영주(永住)를 결정하고, 아예 영국으로 귀화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행복한 헨델에게도 시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영국 귀족들의 반발에 설상가상으로 경쟁사의 발라드 오페라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가 잇단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영어로 씌어진 「거지 오페라」는 정치풍자와 익살적인 이야기, 풍부한 아리아, 극중 대화체 사용, 유행하는 노래의 적절한 활용 등을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헨델의 무겁고 진지한 아카데미 오페라를 순식간에 위기로 몰고 갔다.
1727년, 헨델은 신작 「시로에」와 「톨로메오」를 무대에 올렸지만, 별달리 재미를 보지 못했다. 재미는 커녕, 잇단 흥행실패로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였다. 출연자의 게런티조차 지불하기 어려웠다. 결국 파산한 헨델은 오페라 대신에 대중적 오라토리오 작곡 쪽으로 말을 갈아탔다. 귀족과 일반이 좋아하는, 가령 「메시아」와 같은 오라토리오는 그간 오페라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었다. 사후 그는 2만 파운드를 남겼다. 그 가운데 19,520 파운드가 오라토리오 작곡으로 얻은 수익이었다.
유쾌하고 풍요로운 왕실음악가
1959년, 헨델은 74년의 삶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시력 약화가 백내장·완전실명으로 옮아갔고, 여기에 뇌졸중도 가세했던 터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꿋꿋하게 살았다. 딸린 아내나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는 언제나 풍요로웠다. 무엇보다 그는 돈 문제가 깨끗했고, 오페라 가수나 관현악 주자에게 늘 융숭하게 대접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호의적이었다. 더구나 먹고 마시는데는 어떠한 경우라도 아끼는 법이 없었다.
유쾌한 삶을 누렸던 헨델은 런던 시민들의 애도 속에 장례가 치러졌고, 사후 ‘영예의 전당’이라 할 만한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깊이 잠들었다. 실제 헨델은 영국에서 거의 국가적 존재로 추앙 받았다. 그의 음악은 영국에 대한 애국심이나 충성심과 직접적으로 동일시되었고, 왕은 국민들의 신망을 회복하기 위해서 대중의 연인이었던 헨델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바로 국가의 기념의식이나 축제를 통해서였다.
김창욱(음악풍경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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