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부산』 2015년 3월호(통권 제117호)
위의 그림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 J. Haydn 1732-1809)의 초상이다. 곱게 빗어내린 머리, 장식적인 앞섶과 단정한 매무새, 무엇보다 잘 생긴 얼굴에는 남성다움이 물씬 풍겨난다.
그러나 머리는 가발을 뒤집어 쓴 것이고, 옷은 귀족들 앞에서 연주할 때 입는 정식 복장이다. 더구나 얼굴은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곰보기가 남아 있었고, 유난히 큰 코는 구부러져 매부리가 되었다. 코 끝에도 늘 습진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으며, 아랫입술마저 앞으로 툭 튀어 나와 볼품이 없었다. 다리도 짧았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품격 높은 하이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초상화가의 유려한 손놀림 덕분이다.
교향곡의 아버지, 파파 하이든
하이든은 일흔일곱까지 살았던 최장수(最長壽) 음악가다. 그는 앞서 65살에 죽은 바흐나 74살에 세상을 뜬 헨델보다 오래 살았다. 이처럼 그가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의 유쾌하고 낙천적인 성격 때문으로 보인다. 비록 매력적이거나 내세울 만한 외모를 갖지 못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성실했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언제나 겸손했고, 어디서나 배려심이 많았다. ‘파파 하이든’은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의 주요한 창작장르가 교향곡일 뿐 아니라, 그 수도 무려 104곡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수가 많다고 해서 높은 평가를 얻은 것은 아니다. 질적인 면에서도 매우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터다.
교향곡(交響曲, symphony)의 전신은 신포니아(sinfonia)였다. 그것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서곡에서 비롯되었는데,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 구조에 단순한 오케스트라 편성이었다. 그런데 하이든은 2악장과 3악장 사이에 미뉴엣을 삽입함으로써 교향곡의 정형적인 틀(4악장)을 정립했고, 기존의 현악중심에서 벗어나 목관과 금관악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하이든이 변화무쌍한 교향곡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그를 둘러싼 음악환경과 직접적으로 상관된다. 그는 18살 때 비엔나 모르찐 궁정, 28살 때 헝가리 에스테르하찌 궁정에 들어가 58살까지 무려 40년 간이나 궁정악장을 지냈다. 그것은 오케스트라 음악의 음색과 음향을 자유롭게 실험하고 혁신시키는데 중요한 토대로 작용했다. 더구나 당대 예술가의 패트런이었던 궁정 후원은 그의 안정된 음악활동을 가능케 했다.
하이든은 오스트리아 로라우에서 수레바퀴를 만드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마티아스 하이든은 바흐와 마찬가지로 두 번 씩이나 장가를 들었다. 첫 아내는 안나 마리아였다. 그녀는 12명의 자식을 생산했다. 금슬이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리아는 병으로 곧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부득이 마티아스는 전처와 이름이 비슷한 마리아 안나 세더와 재혼했다. 후처는 여기에 5명의 자식을 더 추가했다. 도합 17명이다. 그렇지만 20명의 바흐까지는 결코 이를 수 없었다.
하이든은 후처 안나 세더의 소생으로 위로 누나가 하나 있는 장남이었다. 같은 배에서 난 동생 요한 미하엘과 요한 에반겔리스트도 이후 음악가가 되었지만, 그들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이든은 7살 때 음악에 입문했다. 비엔나의 성 슈테판 성당에서 가창법과 연주법을 배우면서였다. 그는 소년합창단원으로 빼어난 음악적 기량을 선보였다. 줄곧 합창단의 독창자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한때 아버지 마티아스는 어린 하이든을 카스트라토로 만들자는 제의를 받기도 했다.
궁정악장, 잡무에 파묻힌 하인
카스트라토(castrato)는 ‘거세된 남성 소프라노 가수’를 말한다. 변성기(變聲期)가 지나지 않은 소년을 거세할 경우, 후두(喉頭)는 소년기의 것 그대로지만 폐(肺)는 점차 성인의 것으로 발달하게 된다. 거대한 폐활량으로 소년기의 후두를 통해 내뿜는 목소리는 대단히 강력하고 매끄러웠으며, 특히 높은 음역에서 화려하고 현란한 기교를 자유자재로 과시함으로써 당시 오페라의 주연은 물론, 빈궁한 가정에서는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티아스는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변성기가 지나면서 맑고 낭랑한 소년 보이스를 잃어버린 하이든은 동네 아이들에게 음악레슨을 하거나, 밤거리의 세레나데 음악단원으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독학을 하기도 하고, 니콜로 포르포라의 문하에서 이탈리아적 화성음악을 배우기도 했다. 포르포라는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동시에 유명한 노래선생으로 영화 「파리넬리」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재능 있는 음악지망생을 캐스팅해서 세상에 널리 소개하는 일도 즐겨 행했다. 하이든이 당시 음악애호가, 즉 귀족들 사이에서 작곡가로 알려지게 된 것도 포르포라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
1750년, 18살의 하이든은 마침내 모르찐 궁정의 악장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열심히 음악활동을 벌였다. 3악장 짜리 로코코 스타일(rococo style, 바로크에 비해 밝고 유쾌하며 자유로운 양식)의 교향곡이나 디베르티멘토(divertimento, 가볍고 즐거운 음악으로 귀족들이 밥 먹을 때 연주한다해서 식탁음악이라도 함)를 많이 썼다. 젊고 열정에 넘치던 그는, 그러나 10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악장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궁정의 어려운 재정문제가 급기야 악단의 해체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는 1760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찌 궁정의 악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여기서 30년 동안의 악장생활을 유지했다. 악장의 직무는 매우 많고도 다양했다. 귀족들이 원하는 음악을 적재적소에 작곡하는 일, 악단과 가수들을 매일 연습시키는 일, 연주무대에서 지휘를 맡아 행하는 일 등이 주요한 임무였다.
그러나 그 밖에 자질구레한 잡무들도 많았다. 악보와 악기를 관리·보수하는 일, 가수나 연주자를 계약하는 일, 단원의 인사(人事)와 휴가를 보내는 일, 심지어 연주복을 맞추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짜증이나 싫증을 내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유쾌했고, 뛰어난 유머 감각과 친밀감은 고용주와 연주자들과의 늘 좋은 관계를 유지시켜 주었다. 특히 음악 종사자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는데도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신분은 후원자에게 봉사하는 하인의 지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 시기, 1760년 하이든은 ‘마리아 안나 알로이자 아폴로니아 켈러’라는 매우 긴 이름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 이름이 길어서일까? 그는 40년 동안 남편 하이든의 속을 썩였다. 미용사의 딸이었던 그녀는 하이든보다 3살이 많았고, 하이든보다 외모도 달렸다. 게다가 신경질에 질투심이 강했고, 잔소리도 심했다. 더구나 낭비벽도 만만치 않았으며, 아이도 못 낳는 석녀(石女)였다. 심지어 그녀는 남편이 갓 작곡한 악보를 식기 받침대로 쓰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하이든은 아내를 가리켜 ‘지옥의 짐승’, 그녀와의 결혼을 ‘일생 일대의 실수’라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긴 세월을 아내와 더불어 살았다. 비록 말년에 별거는 했지만. 모두가 그의 품 넓은 배려심과 강한 인내력 덕택이었다.
영국의 “영광스러운 접대”
1790년, 58살의 하이든은 궁정악장직을 내려놓았다. 궁정의 주인이었던 에스테르하찌 후작이 죽은 다음 안톤 후작이 그 뒤를 이어 권좌를 차지했는데, 그는 야외 주악을 위한 최소 편성의 관악단만 남기고 악단을 해산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새 주인은 많은 연주자들을 해고시켰다. 그런데 하이든 만큼은 그대로 남겨두고, 월급도 제때 지급했다. 신분도 궁정의 명예악장이었다. 의아한 것은 그에게 어떤 의무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시간은 남았고 할 일이 없었던 하이든은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영국의 음악매니저였던 잘로몬으로부터 훌륭한 제의를 받았다. 자신이 주관하는 런던에서의 음악회를 위해 6곡의 새로운 교향곡과 20곡의 소품을 작곡·지휘해 준다면, 1회 연주회마다 악보출판료를 제외하고도 350파운드를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솔로몬의 제의에 흔쾌히 응했다. 하이든의 신작 교향곡은 자유로운 영감, 세련된 선율, 기교적인 연주어법을 보여주었고, 이 광경을 지켜 본 영국 청중들은 “전기 충격과도 같은 감동”(찰스 버니)을 받았다.
하이든에 대한 영국의 “영광스러운 접대”(하이든의 일기)는 왕실뿐이 아니었다. 당대 저명한 인사들로부터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옥스퍼드대학 명예 음악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그러나 하이든의 유쾌한 삶은 1809년에 이르러 막을 내렸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일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비엔나 군펜도르프에서 죽은 그는 푼트시투르머 묘지에 묻혔고, 뒤에 아이젠슈타트의 베르크교회로 이장되었다.
김창욱(음악평론가, 음악풍경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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