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의 음악은 대체로 귀엽고 깜찍하며 앙증맞기까지하다. 그에게 음악이란 “끔찍한 환경에서도 귀를 괴롭히지 않고 즐길 수 있어야 하며, 항상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하는”(1781년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어떤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음악은 오늘날 연주회뿐만 아니라, 실용적 목적에서도 즐겨 쓰이기도 한다. 가령 EQ(감성지수)를 높이거나, 빵을 맛있게 익게 할 때, 혹은 열매의 당도를 높이기 위해서도 그의 음악이 사용된다. 요컨대 모차르트가 죽은지 200여 년이 훌쩍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꿈틀대고 있는 셈이다.
천재 음악가의 유럽 연주여행
모차르트는 35년의 매우 짧은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대에 씌어졌던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을 두루 작곡했다. 오페라 27편, 교향곡 67편, 행진곡 31편, 관현악무곡 45편, 피아노협주곡 42곡, 바이올린협주곡 12곡, 디베르티멘토 40곡, 기타 등 600여 편에 이른다. 다작의 모차르트는 “부리나케 (음악을) 썼다. 모든 것이 이미 작곡되었으나, 기록되지 못했다.”(1780) 오페라 「돈죠반니」 서곡은 단 하룻밤 사이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음악에 빠져 있고, 온종일 그것을 생각하며 궁리하고, 연주하고, 숙고”(1778)했다.
모차르트는 예민한 청각(절대음감)을 타고 났다. 게다가 그는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악보 반출이 금지되었던 시스티나 성당에서 알레그리의 9성부 음악 「미세레레」를 듣고, 이를 성당 밖으로 나와 고스란히 오선보에 복원해 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서너 살 무렵에 이미 작곡을 하고, 6살부터는 유럽 전역에 걸쳐 연주여행을 할 정도로 클라비어 즉흥연주에 빛을 발했다. 타고난 천재와 이상적 인간을 향해 열려 있던 서구 세계는 어린 모차르트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우구스부르크 출신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사이에서였다.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의 부악장을 지냈고, 궁정작곡가이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일곱 명(3남 4녀)의 자식을 두었다. 그러나 자식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 병으로 죽었다. 넷째 마리안네(나넬)와 막내 모차르트만 겨우 살아남았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25년을 보냈다. 유년기의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드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확인하면서부터 그는 어린 모차르트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레오폴드와 모차르트, 그리고 마리안네는 비엔나를 비롯해서 독일(뮌헨·만하임·프랑크푸르트), 영국(런던), 네덜란드(헤이그·암스테르담), 프랑스(파리), 스위스(제네바·취리히), 이탈리아(밀라노·나폴리·로마·볼로냐) 등지를 잇따라 순례했고, 외국의 새로운 음악에 대한 경험은 모차르트가 독창적인 작품을 쓰는데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신동 대접을 받으며 연주여행을 다니던 청년 모차르트는 17살 때인 177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의 관현악단 악장(Kapellmeister)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콜로라도 대주교와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콜로라도는 가톨릭을 프로테스탄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는데, 교조적인 성격의 대주교와 자유분방한 모차르트는 애당초 궁합이 맞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21살 때까지 궁정에서 미사곡과 사교적인 작품을 열심히 썼지만, 모차르트의 돌출적인 행동과 잦은 연주여행은 대주교의 신경을 거슬렸다. 한편으로 대주교는 모차르트를 자신의 노예처럼 옭아맸다. 연주는 오직 자신의 저택에서만 하고, 식사는 하인들과 함께 하도록 강요했다. 그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자유 끝에 직면한 생존의 문제
그는 얼마 안되는 급료를 받고 대주교에 구속 당하느니, 차라리 자유로운 창작과 연주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파이오니어를 동경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겼다. 대주교의 저택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이로써 그는 궁정의 후원을 일절 받지 않는 자유예술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그는 숨 막히는 궁정생활에서 자유를 찾았지만, 다른 한편 음악으로써 자신의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
22살 때 어머니를 여읜 모차르트는 25살이 되던 1782년 비엔나로 옮아왔다. 그는 여기서 후반기 10년을 살았다. 이듬해 그는 동갑나기 처녀인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마탄의 사수」를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조카였다. 그러나 아버지 레오폴드는 자신의 며느리가 될 콘스탄체를 마땅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결사적으로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콘스탄체가 비엔나 사교계에서 매우 교양 없는 처녀이며, 더구나 그녀의 어머니가 딸을 좋은 가문에 시집 보내 든든히 한 몫 챙기려 한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결혼서약서까지 쓰면서 콘스탄체를 아내로 받아 들였다. 서약서에는 서약 후 3년 이내에 결혼을 해야 하며, 만약 결혼하지 않을 경우 해마다 300굴덴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300굴덴이라면, 궁정 작곡가 시절에 모차르트가 받은 연봉 450굴덴의 2/3에 해당되는 거액이었다. 게다가 콘스탄체는 병약했고, 낭비벽도 심했다.
그러나 아내 콘스탄체의 낭비벽은 모차르트에 비하면 약과였다. 그는 당시 음악가로서 최고의 수입을 올렸으나, 호화주택에 살면서 비싼 구두와 보석으로 장식된 고급의상을 샀고, 자기 소유의 마차도 구입했다. 집에는 고급 당구대를 마련하고 수시로 당구를 즐겼다. 천성적인 낭비벽이 있었던 그는 당시 엘리트 문화에 어울리는 분위기로 자신을 맞추려 애썼다. 그는 당대 최고의 교양을 갖춘 사교계의 중심인물이자, 적어도 음악계에서는 귀족들과 같은 수준임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모차르트는 비엔나에서 10년 동안 많은 돈을 벌었다. 주요 수입원은 개인레슨이었다. 레슨비는 1인당 100플로린이었고, 그에게는 최소한 3명의 제자가 있었다. 또한 잇단 연주회의 성공에 따른 작곡위촉과 악보출판료도 적지 않았다. 그 무렵 비엔나에서 살아가려면 1년에 1,200플로린이면 족했다. 그러나 그는 1784년 3,700플로린, 1787년에는 3,300플로린, 1788년에는 사정이 나빠졌으나 적어도 1,400플로린 이상은 벌어 들였다.
모차르트의 사치와 허영은 결국 그를 빚쟁이로 내몰았다. 그는 거기서 탈출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는 흥행을 목적한 오페라를 잇따라 썼다. 「피가로의 결혼」·「코지 판 툿테」·「마술피리」·「돈죠반니」 등이 그것이다. 특히 희가극 「피가로의 결혼」은 18세기 말 상류층 귀족을 비판하고 풍자한 것인데, 모차르트를 오페라 작곡가로 우뚝 서게 만든 작품이다. 알마비바 백작이 피가로의 약혼자인 수잔나를 꾀려고 갖은 수작을 부리다가 결국 비웃음을 산다는 이야기다. 이 무렵 서양에서는 초야권(初夜權)이라는 희한한 전통이 있었다. 하인이 결혼할 경우 주인(귀족)이 예비신부와 먼저 첫날밤을 보낼 수 있는 권리였다.
모차르트의 잇단 오페라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빚은 갈수록 늘어났다. 그는 구걸하기 시작했다. 사채업자인 지인 미하엘 푸흐베르크에게 돈을 꾸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아예 1년치 1,000플로린을 보내주면 반드시 이자를 붙여 갚겠다고도 썼다. 제때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독촉편지를 썼고, “병든 처자식이 굶어죽게 생겼다”며,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
사치와 허영이 죽음으로 내몰아
불쌍한 모차르트의 궁핍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악보를 팔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고,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전당포에 맡겼다. 자신의 승마용 말도 팔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1791년 7월), 그는 검은 망토를 걸친 한 사나이의 방문을 받았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는 거액의 계약금(금화 50두카덴)을 내고 레퀴엠 작곡을 의뢰해 왔다. 빈궁한 모차르트로서는 대단히 반가운 제의였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작곡에 매달렸다. 그러나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4개월 후인 1791년 12월 5일 미완의 레퀴엠을 남기고 죽었다.
이튿날, 모차르트의 장례식이 열렸다. 황제 요제프 2세의 호화장례 금칙령에 따라 8굴덴의 저렴한 장례였다. 반 스비텐의 지휘로 장송곡이 연주되었고, 그는 극빈층이 묻히는 공동묘지에 대충 묻혔다. 이날은 날씨가 나빠 눈보라나 진눈깨비가 날렸고, 때마침 격렬한 뇌우가 휘몰아쳤다(영화 아마데우스)고 하나, 실제로는 춥기는 했지만 온화한 날씨였고, 마지막까지 유체를 따라간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장된 모차르트 유해의 행방은 찾을 수 없다. 그가 안장된 성 마르크스 묘지는 가묘다.
김창욱(음악평론가)
들으면 좋을 음악
피아노 소나타 제1번(KV. 331) 3악장
피아노 소나타 제16번(KV. 545) 1악장
피아노 협주곡 제23번(KV. 488) 1악장
피아노 변주곡 「‘아, 어머니 당신께 말씀드리지요’에 의한 12변주」
실내악곡 「세레나데」 제13번(KV. 525) 1악장
클라리넷 협주곡(KV. 622) 2악장
교향곡 제25번(KV. 183) 1악장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서곡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아리아 「이제는 날지 못하리」
오페라 「마술피리」 중 아리아 「지옥의 복수심 불타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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