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베토벤을 아시나요?

浩溪 金昌旭 2015. 5. 6. 16:18

 

『예술부산』 2015년 5월호(통권 제119호)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하이든만큼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기지도 않았고, 모차르트처럼 타고난 천재도 아니었다. 그는 작품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했고, 단 몇 마디의 모티브를 작곡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나 음악역사에 우뚝 선 위대한 작곡가로서 베토벤의 모습과는 달리,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은 고난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늘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렸고, 타협을 모르는 괴팍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인간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지독한 구두쇠였다.

 

 

낭만주의를 예고한 음악적 혁명가

 

베토벤은 고전시대 음악의 막내였던 동시에, 낭만시대 음악의 장자였다. 그는 앞선 선배음악가였던 하이든·모차르트의 고전주의 음악전통을 착실하게 따랐다. 그러나 그는 머잖아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을 구현해 냈다. 그는 소나타·교향곡·협주곡·현악4중주 등의 영역을 확대했을 뿐 아니라, 음악의 형식적·구조적 견고성을 획득했다. 특히 그는 교향곡 제9번(합창)에서 여지껏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성악과 기악을 처음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이후 표제음악의 가능성을 예고하기도 했다.

 

베토벤은 독일 본(Bonn)에서 태어났다. 궁정악장이었던 할아버지 루드비히가 앤트위프 지방에서 이주한 이래, 줄곧 여기서 살았다. 아버지 요한은 루드비히의 막내였고, 궁정악단의 테너가수로 활동했다. 그의 어머니는 마그다레나라는 여성이었는데, 궁정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궁정에서 서로 눈이 맞아 결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모두 네 명의 자식을 생산했다. 전원 사내아이였다. 베토벤은 차남이었고, 아래로 안톤 칼, 니콜라우스 요한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는 장남이었던 형이 병으로 일찍 죽음으로써 보잘 것 없는 장자로서의 지위를 승계할 수밖에 없었다.

 

베토벤은 4살 때 음악에 입문했다. 그렇지만 그의 음악학습은 험난했다. 아버지의 강요와 폭력 때문이었다. 그는 어린 베토벤을 잠도 재우지 않고 클라비어 연습에 매달리게 했다. 일찍이 베토벤의 음악성을 간파한 아버지는 아들을 당시 유명세를 떨치던 모차르트처럼 만들고 싶어했다. 요컨대 요한이 베토벤에게 음악을 공부시킨 것은 아들을 키워 한 몫 잡으려는 속셈에 불과했다. 그는 술주정뱅이에다 철저한 인격파탄자였다.

 

폭압적인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음악을 싫어하거나 염증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음악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 갔다. 9살 때는 고트리프 네페에게 정식으로 작곡을 배웠다. 여기서 그는 화성학과 연주법,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공부하는가 하면, 13살 때는 궁정악단의 반주자로 나섰다. 특히 17살 때 모차르트로부터 즉흥연주 실력을 인정 받고, 22살 때 하이든으로부터 자작 칸타타에 대해 칭찬을 받은 일은 작곡가로서 꿈을 키우던 베토벤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베토벤은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제2의 모차르트가 되고 싶었다. 그는 모차르트를 흠모했고, 그의 음악을 동경했다. 그는 모차르트를 만나 배움을 얻기 위해서 비엔나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차르트는 이미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다. 부득이 베토벤은 다른 방도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항상 아끼고 후원했던 발트슈타인 백작에게 도움을 청했다. 발트슈타인은 비엔나 사교계의 거물로 그곳 귀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베토벤에게 “친애하는 베토벤 군이여! 부디 방심하지 말고 부지런하여 하이든의 손에서 모차르트의 영혼을 받으라”며, 모차르트 대신, 하이든에게 배우기를 권했다. 꿩 대신 닭이었던 셈이다. 그는 백작의 권유를 받아들여 22살에 비엔나로 떠났다. 하이든의 가르침은 1년 동안 계속되었으나, 그의 레슨은 매우 불성실한 것이었다. 이미 60을 넘긴 하이든은 베토벤의 끓어오르는 열망을 만족시키지 못했을 뿐더러 틀린 과제를 제출해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베토벤은 제2, 제3의 스승이 필요했다. 그는 요한 쉥크, 알브레히츠베르거, 살리에리 등을 찾아 따로 음악을 배웠다. 물론 하이든 몰래 이루어진, 은밀한 레슨이었다.

 

 

궁핍한 삶, 꿋꿋한 예술가의 자존심

 

30을 넘어서도 베토벤은 여전히 고달팠다. 피아노와 작곡레슨·연주·작곡으로 겨우 연명했다. 1820년 이후 베토벤은 최악의 재정상태에 직면했다. 편지에서 돈 이야기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궁핍했다. 가난은 늘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때는 막내동생 니콜라우스 요한에게 경제적 원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엄청난 토지를 소유한 부자였지만, 형의 요청을 냉담하게 거절했다.

 

“형이 선택한 직업은 원래 생활을 곤궁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형의 궁핍은 형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책임도 형 스스로 져야 할 것입니다. 토지 소유자 동생 요한”과 같이 단 한 푼의 돈도 줄 수 없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자존심 강한 베토벤은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당장 답신을 썼다. “너의 돈은 필요 없다. 너의 설교도 필요 없다. 두뇌 소유자 형 루드비히”. 둘다 ‘소유자’였지만,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는 지점은 서로 달랐다.

 

베토벤은 하루바삐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돈을 버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벌어들인 돈이 새지 않도록 막는 일이었다.

 

먼저 베토벤은 음악을 팔아 돈을 벌어야 했다. 음악의 가치와 순수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돈을 벌어야 했다. 돈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작품의 순수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상품으로 내다팔았고, 티켓을 팔아 최초의 공공연주회를 열었다. 그는 돈을 받고 작품을 대여해 주기도 했다. 음악을 철저한 거래개념으로 인식한 베토벤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웰링턴의 승리」를 거금 4,000플로린에, 「발트슈타인」을 700굴덴, 현악4중주 1곡당 30듀카트에 팔았다. 에누리도 없었다. 심지어 저작권을 침해하면서까지 작품을 팔았다. 4곳의 악보출판사에 각각 「C장조 미사」의 출판료를 1,000굴덴 씩을 받고 팔았고, 필사본 악보도 10부 씩이나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는 자기 작품의 상품가치를 최대한 활용했다.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토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들은 내게 많은 수입을 안겨주었고, 만족 이상의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네. 작품마다 예닐곱 명의 출판업자들이 달라붙는데, 내가 좀더 신경 쓴다면 더 많은 업자들이 달려들 게 뻔하다네. 이제 그들은 내 요구에 대해 흥정하지 않고 그대로 지불한다네.”

 

저명한 작곡가로 인정 받은 베토벤의 모습이다. 스스로를 과시하는 듯한 뉘앙스도 풍긴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태도를 용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만약 그가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했다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드는 수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베토벤은 들어온 돈이 새지 않도록 적극 막아야 했다. 그는 빵을 위해 예술가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궁핍한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서는 구두쇠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주위의 비난을 받을 정도의 구두쇠였다. 깨알같은 글씨로 가계부를 쓰기도 했다. 가령 “스승 하이든과 마신 커피 6크로이체르, 초콜릿 22클로이체르”와 같이. 그러나 그의 산수실력은 터무니 없었다. 두 자리 수의 곱셈이나 덧셈도 잘못해서 틀린 값을 쓰기가 일쑤였다.

 

그렇다면 베토벤은 왜 가난했던가?

 

오랫동안 음악가를 후원해 준 곳은 궁정과 교회였다. 바흐·헨델·하이든과 같은 앞선 선배 음악가들도 그곳의 귀족과 신앙에 봉사하며, 음악활동을 이어왔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시민사회의 형성은 궁정과 교회로부터 독립된 예술과 예술가를 요구했다. 지난 시대의 관습에서 벗어나 독립과 자유를 누리려면, 음악가들은 오직 자신의 음악에 생존을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귀머거리 음악가가 남긴 희망의 노래

 

베토벤은 평생 단 한 번의 장가도 가지 못했다. 그는 노총각으로 늙었고, 노총각으로 삶을 끝냈다. 그렇다고 그 주위에 여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흔히 ‘불멸의 연인’으로 세 명의 후보가 물망에 오른다. 기치아르디 백작의 딸로 잠시나마 자신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줄리에타, 헝가리 브룬스비크 백작의 딸로 피아노 제자였던 테레제, 테레제의 여동생 요제피나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귀족가문 출신의 처녀였고, 베토벤의 성격은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한편으로 베토벤은 비엔나의 많은 귀족들과 교류했다. 그 가운데 그에게 적극 후원해 준 사람으로는 리히노브스키 후작, 리주모브스키 백작, 루돌프 대공 등이었다. 특히 루돌프는 황제 레오폴드 2세의 막내아들로 베토벤과 평생 돈독한 우정을 나눈 유일한 귀족이자 제자이기도 했다. 그는 베토벤을 평생 후원하려고 애썼다. 로프코비츠·킨스키 후작과 연금 4,000 그루텐을 출자, 베토벤이 죽을 때까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들은 귀족계층의 몰락으로 지불능력을 상실했고, 오직 루돌프만이 유일하게 최후까지 책임을 졌다. 그런 연유로 베토벤은 피아노협주곡 제4번, 오페라 「피델리오」, 피아노3중주곡 「대공」, 「장엄미사」 등 많은 작품들을 그에게 헌정했다.

 

베토벤은 49살이 되면서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작곡가로서의 모든 공식활동을 포기해야 했다. 53살에 마지막 교향곡 제9번(합창)을 남긴 그는 1827년, 마침내 쉰 일곱의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비엔나 중앙묘지에 묻혔다.

 

김창욱(음악평론가, 음악풍경 기획위원장)

http://www.음악풍경.com/ 

 

들으면 좋을 음악

 

교향곡 제3번, 제5번 1악장

교향곡 제7번 2악장, 제9번 4악장

피아노협주곡 제5번, 제8번 1악장

피아노소나타 제14번 1악장, 제17번 3악장

가곡 「그대를 사랑해」, 「아델라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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