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부산』 2015년 6월호(통권 제120호)
음악가의 이상과 현실 ⑥
비엔나의 보헤미안
김 창 욱
음악평론가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키가 작은 편이다.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도 그 가운데 하나다. 게다가 그는 몸이 앞으로 굽었고, 지독한 근시였다. 늘 안색이 좋지 않았으므로 풍채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말솜씨도 몹시 서툴러서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충분히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친구와 가족들에게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낯선 사람에게는 수줍고 소심한 나머지 실례될 만한 언동이 잦았다. 특히 여성에게 그러했다.
연인도 직업도 없는 '가곡의 왕'
낭만시대인 19세기에는 유난히 가곡(Lied)이 많이 씌여졌다. 그것이 독창 선율에 피아노 반주가 붙여진 단순한 음악이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 이 시기 낭만적 경향의 서정시가 일대 붐을 이루었던 까닭이다. 괴테·쉴러·하이네·바이런 등의 시가 그것이다.
가곡에 관한 한 적어도 슈베르트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총 1,200여 편의 작품 가운데 누구에게나 친숙한 노래를 무려 630여 편이나 작곡했기 때문이다. 흔히 그를 ‘가곡의 왕’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슈베르트의 가곡은 서정적인 선율이 많다. 또한 시와 음악의 조화로운 결합도 돋보인다. 더구나 화음중심의 반주에서 피아노를 독립시킨 것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가령 괴테의 시에 의한 「마왕」(Erlkönig, 1815)이 그러하다.
캄캄한 밤중에 말을 탄 아버지가 아들을 품에 안고 폭풍 속을 달린다. 추위에 떨고 있는 아들이 마왕의 환영을 본다. 아들이 두려움에 떨며 소리를 지른다. 아버지는 아들을 안심시키지만, 집에 도착하자 아들이 죽어 있다. 연속되는 셋잇단음의 피아노 반주가 어둠과 폭풍우, 아들의 두려운 마음, 아버지의 성급한 마음 등을 잘 묘사하고 있다.
슈베르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교외의 리히덴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는 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이곳 교장을 지냈고, 어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직공출신이었다. 이들 부부는 무려 14명에 이르는 자식을 생산했는데, 그 가운데 슈베르트는 12번째였다.
그의 삶은 매우 짧았다. 35살에 죽은 모차르트보다 어린, 불과 31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8살 때 동네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부터 음악수업을 받았다. 바이올린·피아노·성악 등이었다. 특히 노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1살 때 왕실예배당의 소년가수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국립신학교 기숙사에 수용되었고, 여기서 일반교육은 물론, 수준 높은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궁정악장을 지냈던 살리에리로부터 화성학을 배웠고, 학생 오케스트라에서 하이든·모차르트의 서곡과 교향곡을 익혔다. 지휘자가 없을 때는 대신 지휘를 맡기도 했다.
16살 때 변성기로 왕실예배당에서 나온 그는 아버지의 초등학교에서 1년 남짓 조수노릇을 했다. 장사꾼의 딸 테레제 그로프(소프라노)를 연모했으나, 그녀 앞에 서면 그는 언제나 작아졌다. 그러던 사이, 그녀는 부잣집인 빵집 아들과 덜컥 결혼해 버렸고, 닭 쫒던 개 신세가 된 그는 음악교사 자리를 얻으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기껏 보조교사나 임시교사로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상류층이나 중류층 가정의 사교모임에 나가 자작 가곡을 반주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작은' 음악의 대가와 슈베르티아데
일정한 직업이 없다는 것은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돈이 없었다. 방세가 없어 친구집을 전전하는가 하면, 오선지도 살 수 없는 처지여서 광고쪽지에다 곡을 썼다. 그는 돈이 없었지만, 한편으로 시간은 풍족했다. 이 무렵 「들장미」·「마왕」·「송어」 등 무려 145편의 빛나는 가곡을 썼다. 교향곡도 썼다. 그가 짧은 기간에 그렇게 많은 음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남아도는 시간 덕분이었다.
슈베르트는 20대에 이르러 오페라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롯시니의 이탈리아 오페라가 비엔나에서 크게 유행했고, 여기서 그는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페라 작곡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그는 모두 9편의 교향곡을 남겼으나, 제8번 교향곡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더구나 이것은 2악장까지만 쓰여졌고, 3악장은 9마디만 오케스트레이션이 되어 있다. 「미완성」의 이 교향곡은 작곡가가 죽은 후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연주되지 않았다. 그것은 슈베르트가 대작에 능숙하지 못했고, 두뇌를 쓰는 일이 낭만적 감성을 지닌 그에게는 애당초 맞지 않았던 까닭이다. 요컨대 그는 '작은' 음악의 대가였다.
연애 실패, 구직 실패, 오페라 작곡 실패... 연속되는 실패는 슈베르트로 하여금 차츰 현실과 무관한, 머언 이상적인 세계를 동경케 했다. 몇몇 친한 벗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요제프 시파운, 요한 마이어호프, 프란츠 폰 쇼버, 미카엘 포글, 쿠펠뷔저, 폰 쉬빈트 등이 그의 절친이었다. 그들은 '슈베르트의 친구들'이라는 뜻의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s)를 만들어 친구 슈베르트의 곤궁한 처지를 돕고자 노력했다.
그의 친구들은, 예컨대 슈베르트에게 연주회를 주선해 주거나 홍보를 대행해 주는가 하면, 그의 가곡집 출판과 악보 인세의 수령을 대신해 주었다. 또한 예술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토론은 물론, 나아가 슈베르트의 음악적 열정을 한껏 북돋아 주기도 했다. 위촉을 받아 어렵사리 작곡한 「쌍둥이 형제」가 초연에서 실패하자 슈베르트는 갖은 악평에 시달렸다. 그는 실의에 빠졌고, 친구들은 당시 궁정악단 연봉에 해당하는 500굴덴의 작곡료를 대신 챙겨주며 슈베르트를 격려했다.
요제프 시파운은 평생 슈베르트와 변함 없는 우정을 나눈 친구였고, 요한 마이어호프는 시파운의 소개로 만난 시인이었다. 마이어호프는 슈베르트를 괴테와 다리를 놓아주려고 애썼다. 그는 괴테의 시로 만든 슈베르트의 악보를 정서해서 대단히 정중한 편지와 함께 괴테에게 보낸 적도 있다. 그러나 괴테는 편지를 제외하고, 슈베르트의 악보를 전량 반송해 버린다. 슈베르트의 음악이 괴테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한 까닭이다.
스웨덴 출신의 독일인이자 비엔나 유학생이었던 프란츠 폰 쇼버는 방값이 없었던 슈베르트에게 선뜻 방을 내준 친구였다. 슈베르트는 친구 덕분에 한동안 작곡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을 얻은 셈이다. 그런 연유로 슈베르트는 쇼버의 시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쇼버의 동생이 외국에서 돌아오자, 슈베르트는 얹혀 살던 방을 곧 비워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카엘 포글은 쇼버의 소개로 알게 된 친구였다. 그는 슈베르트보다 무려 29살이나 많았다. 이미 그는 배우와 성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드나드는 상류·중류층 가정의 사교모임에서 슈베르트의 가곡을 노래했고, 슈베르트는 피아노 반주를 맡았다. 이로써 슈베르트 음악은 차츰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덩달아 그의 명성도 높아갔다.
슈베르트의 친구들 가운데는 몇몇 화가도 끼어 있었다. 쿠펠뷔저와 폰 쉬빈트였다. 슈베르트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친구가 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슈베르트의 초상화는 물론, 그의 생활의 단면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것은 슈베르트를 불특정 다수에게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고, 슈베르트의 역사적 기록자료로 오늘날에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방랑·방황·방탕의 날들
그러나 슈베르트의 돈벌이는 늘 신통찮았다. 가곡집 『마왕』이 출판되자, 출판업자 디아벨리는 겨우 2굴덴의 저작료를 지불했을 뿐이다. 게다가 「방랑자 환상곡」을 출판한 디아벨리는 무려 40년 동안 10,000탈러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슈베르트에게 지불한 저작료는 350탈러에 불과했다.
어쩌다 큰 돈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슈베르트의 인기가 치솟자 디아벨리는 가곡 1편에 200굴덴의 저작료를 지불했다. 그것은 당시 보조교사의 연봉 40굴덴의 5배에 이르는 액수였다.
차츰 수입이 늘어났지만, 슈베르트는 피아노 1대를 살 능력이 없었다. 보헤미안적 로맨티스트였던 그는 돈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돈이 생기는 날이면 으레 화려한 만찬이 열렸고, 돈은 방탕한 생활을 위한 유흥비로 흩뿌려졌다. 23살의 젊은 슈베르트가 치명적인 병(매독)을 얻은 것도 문란한 그의 생활과 무관치 않다.
매독은 슈베르트의 창작의욕을 크게 떨어뜨렸다. 더구나 기억력 감퇴에 정신착란 현상까지 보였다. 1828년 11월 19일, 마침내 그는 비엔나에서 삶을 마감했다. 31살의 한창 나이였다. 유언에 따라 그는, 자신이 신(神)처럼 떠받들었던 베토벤의 벨링크 묘지 무덤 가까이에 묻혔고, 이후 지멜링크의 중앙묘지로 이장되었다. "음악은 여기에 풍성한 보배, 그러나 아직 한층 더 훌륭한 희망을 매장하였다"는 묘비명이 새겨졌다.
들으면 좋을 음악
가곡
「마왕」(Erlkönig, 1915)
「음악에」(An die Musik, 1817)
「송어」(Die Forelle, 1817)
「밤과 꿈」(Nacht und Träume, 1823)
「아베마리아」(Ave Maria, 1825)
「세레나데」(Serenade, 1828)
「들장미」(Heidenröslein, 1829)
피아노5중주곡 「송어」(Die Forelle, 1819)
현악4중주곡 「죽음과 소녀」(Death and the Maiden, 1821)
피아노독주곡 「방랑자 환상곡」(Wanderer Fantasy, 1822)
소나타 「아르페지오네 소나타」(Arpeggione Sonata, 1824)
교향곡 제8번 「미완성」(Unfinished,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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