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그(E. Grieg 1843-1907)는 19세기 말 노르웨이의 민족주의 작곡가. 그의 모음곡 「페르귄트」(Peer Gynt)는 몽상과 모험을 꿈꾸는 페르귄트의 이야기(입센의 희곡)를 토대로 하고 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산속 마왕의 동굴에서」(In der Halle des Bergkonigs)는 「페르귄트」의 네 번째 곡. 짧지만 대단히 명쾌하다. 반복과 변화가 특징이다. 무엇보다 저음 목관악기 바순의 활약상이 유독 돋보인다. 느리게 시작해서 점차 빨라지는 진행과정은 산속 마왕의 동굴에 들어간 페르귄트의 심리상황을 유효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긴장감에서 불안감으로, 불안감에서 공포감으로 순식간에 확장된다. 2016. 4. 16 들풀처럼.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산속 마왕의 동굴에서」
페르귄트는 아름다운 연인 솔베이그(영어식으로는 솔베이지)를 곁에 두고도 남의 결혼식장에서 혼례를 치르던 신부를 납치해 산으로 도망치거나, 산속 마왕의 딸과 바람을 피우다 혼쭐이 나기도 한다. 그러다 그는 솔베이그를 남겨 둔 채 배를 타고 머나 먼 이국땅인 모로코와 아라비아 사막을 떠돌며 사기를 치고, 예언자 행세를 하다가 마침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을 발견해 엄청난 알부자가 된다.
금은보화를 배에 가득 싣고 금의환향하던 그는, 그러나 고향 앞 바다에서 뜻하지 않게 풍랑을 만나 결국 알거지가 되고 만다.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만 건지고 귀향한 그는 백발이 된 솔베이그의 품에 안겨 삶의 마지막을 맞는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