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클래식 콘서트의 새로운 가능성

浩溪 金昌旭 2018. 5. 1. 22:45


부산문화회관, 『예술에의 초대』2018년 5월호(통권 제 317호)



콘서트의 성취를 위해서는, 컨셉트·프로그램·레퍼토리 등에서 무엇보다 수용자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컨셉트(concept)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이념적 지표와 상관되며, 설정된 컨셉트로부터 프로그램·레퍼토리와 같은 구체적인 가지와 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해 '노자와 베토벤'이라는 컨셉트로 클래식과 철학의 융합을 시도한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가 올해 들어 한층 업그레드된 무대를 꾸미고자 한다. 즉 '2018 노자와 베토벤-고주망태(孤酒忘態)'가 그것이다. '고독··망각·태도'라는 테마로 연 4, 분기별로 클래식 무대를 열 예정인데, '노자'로 상징되는 동양의 철학적 주제를 '베토벤'이 의미하는 서양음악으로 풀어보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클래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단의 노력이다.

 

그 첫 무대인 '()'(331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는 강병인 캘리그래퍼의 대형 '고주망태' 손글씨 퍼포먼스가 있었고, 곧이어 오충근 지휘자와 최진석 철학자의 토크 콘서트가 진행되었다. 철학자가 고독에 내재된 철학적 의미를 이야기하면, 지휘자는 그와 관련된 작곡가와 그와 조응되는 음악을 연주하는 식이다.

 

가령 철학자가 '고'를 '외로움'과 '고독'으로 구분한 다음, 누구나 스스로 자신감을 갖지 못할 때 '외로움'과 그에 따르는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자신이 무엇인가를 창출하려는 사람은 '고독'하지만 공허감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자아실현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고 언급한다. 그러면 지휘자는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 베토벤과 철저한 고독 속의 '영웅'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짙은 고독감을 '영웅' 2악장의 실제 연주를 통해 선보인다.

 

때로는 토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렉처가 되기도 하는 콘서트는 스비리도프와 브람스의 음악으로 확장되면서 종속과 자유, 중심과 주변 등과 같이 논의의 깊이와 폭도 시나브로 넓혀 갔다. 철학자의 입담은 해학적이었으되 명징(明澄)했고, 지휘와 연주는 안정감 속에 내재된 세련미가 돋보였다. 다만, 2시간을 훌쩍 넘긴 무대는 더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한 주최측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음악을 의미하는 '뮤직(music)'은 고대 그리스어 무지케(Μουσική)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무지케가 의미하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뮤직'의 개념을 훨씬 넘어선다. 즉 고대의 춤·노래·내러티브(narrative) 등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후 변화·분화되었고, 어느 순간 각각 독립된 장르로 정착되면서 경계 지어졌다. 또한 음악은 기악과 성악으로 분화되었고, 기악은 다시 관악과 현악, 피아노로 각각 경계 지어졌다.

 

그들이 쌓아 올린 담벼락은 높았고, 서로의 소통은 일찌감치 단절되었다. 성악은 성악끼리 어울리고, 기악은 기악끼리 어울렸다. 성악은 기악을 모르고, 기악은 성악을 몰랐다. 오직 자기 세계에만 갇혀 각각 제 할 일에만 열심히 몰두하면 다들 무사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음악생태계는 전례 없는 위기를 맞았다. 경계가 무너지고 해체되는 융·복합의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대학은 통폐합을 앞두고 있고, 민간의 음악학원과 전통적인 레슨시장은 시나브로 붕괴직전에 이르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융합하고, 무엇을 복합할 것인가? 무엇보다 통합적 음악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울러 철학·문학·영화·연극··미술과 같이 인접한 예술장르와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어디 그 뿐일까? 음악과 사회, 음악과 종교, 음악의 전통과 현대, 서구음악과 제3세계 음악 등 음악의 융·복합 가능성은 어디나 열려 있다. 그럼에도 클래식은 고고(孤高)하며 여전히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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