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글쓰기'에 관한 몇 가지 생각
김 창 욱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글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쓰는 글은 주로 음악과 관련된 글이기에 음악 글쟁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듯 싶다.
나는 이 글의 제목을 '행복한 글쓰기에 관한 몇 가지 생각'으로 정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겠지만, 글쓰기 역시 기본적으로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 애써 불행을 자초하지는 않는다. 행복은 '기쁜', '즐거운', '놀이같은', '재미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것의 바탕은 돈이 될 수도, 명예가 될 수도, 권력이 될 수도 있다. 또는 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행복은 오직 각 개인의 가치관에 달려 있다!
만약 글쓰기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글쓰기의 효율성이 떨어질 뿐더러 결코 오래 가지도 못한다. 따라서 행복한 글쓰기가 되려면, 적어도 글쓰기에 재미나 취미나 관심이 있어야 한다. 재미가 없다면 재미를 붙여야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재미가 붙지 않는다면 냉정히 포기하는 편이 오히려 낫다.
행복한 글쓰기는 때때로 행복하지 않는 글쓰기를 동반한다. 그러나 이것 쯤은 마땅히 극복해야 한다. 삶은 '고통의 바다'이며, 고통없는 즐거움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한 글쓰기를 위해서는 글쓰는 계(界)가 요구하는 일정한 보편성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약속이며, 글쓰기를 위한 기초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밑줄을 쳐야 한다. 한국 축구를 4강으로 이끈 거스 히딩크가 역설한 것도 결국 체력이라는 기초의 중요성이 아니던가? 기초가 없이 응용을 바란다는 것은 한낱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하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지, 다짜고짜 열 걸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글쓰기를 위해서는, 글쓰기를 위한 기초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 가령 풍부한 어휘와 정확한 문장, 일관성있는 논리, 문맥에 적당한 어휘선택 등을 섭렵해야 한다. 이런 기초가 되어 있지 않으면, 결코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분칠한, 레토릭(rhetoric)을 구사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다독(多讀)·다작(多作)·다상량(多商量)은 필요불가결한 일이다.
아는만큼 보인다. 비단 음악글뿐만 아니라, 인문학책, 사회과학책, 자연과학책 등 닥치는대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써야 한다. 더불어, 그 글이 씌어진 배경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떤 글이건 간에 그것이 씌어진 배경이 있기 마련이고, 그 배경에 따라 해석도 현격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一角)에 가려진 빙산(氷山)을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글쓰기 연습도 끊임없이 행해야 한다. 귀찮지만 일기도 쓰고, 편지(메일)도 쓰고, 논문도 써야 한다. 그러나 허투로 써서는 안된다.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오게 써야 한다. 나아가 자신이 쓴 글은 몇 번이고 소리내어 읽어 보고, 한번쯤 다른 사람에게 읽어달라고 요청해 보는 것도 좋다. 어느 명망있는 프랑스 시인은 자신의 글을 발표하기 전에 반드시 자기집 식모에게 글을 읽어달라고 요청하고, 여기서 일단 통과되어야 지면에 발표했다고 한다. 그 방법을 배운 나는 내 마누라에게 부탁, 그가 오케이해야만 비로소 지면에 발표하고 있다.
글이란 물론 '글쓰는 사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은 그 자체보다, 그 속에 담긴 생각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글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향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글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렇지만 내가 주로 쓰는 글은 대부분 음악과 관련된 것이며, 그 밖의 글은 애써 쓰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글로는 주로 음악논문과 음악평론이 일반적이다. 그 가운데 음악논문은 대개 음악전문가를 대상으로 쓴다. 그러기에 전문적인 식견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음악논문은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단순한 글쓰기가 아닌, 아카데믹한 까닭이다. 하지만 다양한 글들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능력만큼은 길러 두어야 한다. 가치없는 글이나 쓰고 싶지 않은 글은 안쓰면 될 일이지 붓을 탓해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결코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 없다.
염소가 힘이 센 것처럼 글도 힘이 세다. 그러기에 그것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글은 인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결과이며, 개인과 사회의 풍부한 기초가 된다. 그러나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돈이 안된다. 돈을 바란다면, 그만 두는 편이 낫다.
글은 의사소통의 도구이다. 글쓰기는 나와 남의 컴뮤니케이션을 위한 것이다. 즉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 피력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일방소통이 아니라, 쌍방소통이어야 한다. 때때로 일방적인 소통은 다른 사람을 일순 뜨겁게 달구어 놓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내 식기 마련이다. 말과 마찬가지로, 글쓰기 역시 상대가 필요로 할 때 의미와 가치가 있다. 상대가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글을 쏟아놓을지라도 그 효능을 발휘하기 어렵다.
말과 글은 다르다. 말은 흘려버릴 수 있지만, 글은 오랫동안 기록으로 남는다. 말을 담는 매체는 방송이다. 그러나 글의 매체인 신문과 잡지의 위력은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책도 마찬가지다.
글은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가 다른 점은 생명력의 차이다. 생명력을 위해서는 폭넓은 생각과 경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글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쓰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이 담겨 있어야 한다. 남의 이념이나 남의 글의 모방은 곧 남의 정신의 발현이며, 자기 정체성을 찾기 힘들다. 무엇보다 자기의 글에는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이 뚜렷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 정체성은 나의 생각, 나의 색깔, 나의 문체, 나의 뉘앙스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기 정체성은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그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잘 안다. 곧 자기의 장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을 위해서는 남의 논리를 무작정 따라가서는 안된다. 그 논리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망연히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논리는 진리가 아니다! 논리는 진리에 결코 이를 수 없다. 논리는 또 다른 논리를 낳고, 나아가 초논리를 낳기 때문이다.
논리는 달이 아니라, 손가락 끝이다. 어떤 논리건 간에 그 논리는 논리를 펴는 사람이 가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논리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인식에 의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논리는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 시시각각 변한다. 그래서 그냥 망연히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누가 어떤 논리를 주장한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왜? 그러한 논리를 되풀이하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일이 중요하다. 그와 같은 관심법(觀心法)은 그 사람의 이데올로기를 이끌어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글은 무엇보다 진실(眞實)을 바탕해야 한다. 허위의 글은 결코 오래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은 물샐틈없이 써야 한다. 합리성(合理性)과 논리성(論理性)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글은 가능한 쉽게 씌어져야 한다. 특정한 사람이나, 법조문같이 특정한 소수에게만 읽혀서는 안된다. 나아가 글쓰기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근거없는 글쓰기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주장에 불과하다.
글쓰기의 기초는 자료수집과 그 정리이다. 마찬가지로, 음악글의 기초는 음악자료의 폭넓은 수집과 그 정리에 있다. 이것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누구도 즐겨 나서 하지 않기 때문에 고독한 작업이다. 손쉽고 하기 쉬운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없기 때문에 전문성을 갖는 것이다.
자료수집과 정리는 지금이 최선이며, 평상시에 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지나고 나면 애 먹는다. 이것은 원고청탁을 대비해서도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다. 글의 폭을 넓힌다는 것은 곧 현재의 자료수집 및 정리와 글쓰기를 확대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글은 치열하게, 그리고 정치(精緻)하게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피를 흘리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그 글을 읽는 수요자를 생각해야 한다. 수요자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글쓰기는 달라진다. 수요자는 성별·연령·지역·계층·신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또는 그 사람의 근기(根基)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글쓰기는 행복한가? 물론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그만 둘 것이다. 내가 행복한 글쓰기를 하는 이유는 손톱 발톱 다 깎고 나서, 더 이상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할 줄 아는, 나아가 내가 잘 하는 잡기(雜技)가 거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일찍이 고도리나 포커, 혹은 여자 뒷꽁무니를 좇아 바람피우는 일과 같은 일련의 잡기에 능했다면 내 유약한 성향에 비추어 적어도 지금쯤 꽁생원이 하는 학문에 매달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때때로 행복한 글쓰기를 통해 나는 또 다른 행복감을 느낀다. 행복한 글쓰기를 하면, 내 개인적 실적도 올라가고, 대외신인도도 얻고, 장당 1만원의 고료를 벌기도 한다. 오래전 모 대학의 시간강사 채용 때 기본 200%의 실적을 요구했는데, 내가 제출한 서류를 종합해 보니 600%나 되었다 해서 목에 적잖이 힘준 적이 있었다. 혹은, 무슨 무슨 음악회에 가기라도 할 량이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더러 생겼다. 아주 가끔씩, 그들 가운데 어떤 이는 내 곁에 조심스레 다가와 자신의 악단 연주회에 음악평을 좀 써 줄 수 없겠는가 말하기도 한다. 내가 장악하고 있는 매체가 하나도 없음에도 말이다.
나는 그런 것이 나의 대외신인도라 생각하며, 내 몸값을 올리는데 나름대로 공을 들이기도 한다. 6-7년 전만 하더라도 내 글을 실을 수 있는 매체가 어디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공짜배기 원고를 제공해 주기도 했으나, 이제 그럴 필요는 없다. 가만 있어도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청탁받은 원고에 대해서는 밤을 새우더라도, 코피를 쏟더라도 최대한 가공해서 마감시간을 지킨다. 나는 그것이 프로다운 글쟁이의 아름다운 모습이며, 나아가 내 몸값을 올리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글쓰는 것이 개인적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라거나, 대외신인도를 얻기 위해서라거나, 장당 1만원의 고료를 벌기 위해서라거나, 내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할 줄 아는,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한 가지의 일에 절실히 매달리는 것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최소한의 내 존재가치와 결부된 어떤 것이기도 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행복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1984년 입학과 함께 들어간 대학신문사 기자시절부터였다. 내가 신문사에 들어간 이유는 물론 여럿 있었겠으나, 무엇보다 소정의 원고료와 장학금을 지급한다는 광고의 유혹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문은 격주 8면으로 발행되었고, 신문사 주간교수는 국문학과의 이형기(李炯基) 시인이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낙화](落花)로 잘 알려진 그 분이 나를 최종 낙점해 주었다. 마침내 나는 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화려한 수습생활을 시작했다.
암울했던 80년대 전반기를 통해 나는 내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고, 혼란스러운 시국을 안주삼아 술잔을 비웠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 무렵 음악은 물론, 문학과 미술과 연극과 무용에 대한 잡식성(雜食性)의 글을 썼고, 때때로 격문(檄文)도 썼다. 같은 과 교수의 음악회를 비판한 글을 썼다 불려가 혼쭐이 난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경험한 최초의 필화사건(筆禍事件)이었다. 2학년 때 문화부장을 지내면서, 언론의 대체적인 생리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애써 전공학과를 멀리한 탓에 나의 학과공부는 신통찮았다. 2.99라는 졸업평점이 이를 반증해 준다.
그러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그동안 알콩달콩 사귄 애인이 변심할 줄을 꿈에도 모르고, 2년 4개월 반동안 충청도 증평에서 땅벌로 기었다. 88 서울올림픽을 마치고 '영광스런 전역'을 한 나는 복학을 앞두고 이제 음악공부를 좀 해야겠다 싶어 선배로부터 화성학과 대위법을 배웠다. 그러면서 이 시기 한국의 음악계에도 노동은·이건용 등과 같은 실천적 지사(志士)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기뻤다. 그래서 그들의 책과 그와 관련된 책들을 며칠새 완전히 독파하기에 이르렀다. 현실참여의 견지에서,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한 '겨레의 노래' 모집에 [여름비]라는 노래를 작곡해서 입선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편, 성악을 전공했던 나는 그저 눈부시게 아름답기만 한 벨칸토의 '꾀꼬리 소리'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일체의 미련도 남김없이 복학과 동시에 작곡으로 전향했다. 부득이 작곡을 전공했지만, 이 역시 내 전공으로서는 마뜩찮았다. 제도권 내의 창작이란 사회의 현실과 무관한 양식위주의 음악이 주류였고, 20세기 최신기법의 음악에 대한 나의 인내력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서, 졸업작품으로 12음기법에 의한 [씻나락]이란 것을 써서 발표했는데, 그것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냉소적인 표현이었다. 이로써 마침내 작곡과 결별한 나는 또 다시 새로운 전공인 음악학을 사냥하게 된 것이다.
본격적으로 음악글을 쓰기 시작한 글은 연주회 팸플릿의 악곡해설이다. 그것은 당일 연주회 프로그램의 악곡에 대한 대중적 해설을 말하는데, 갈수록 나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많아진 계기가 되었다. 뒤이어 신문과 잡지에 평론도 쓰고, 학술지에 논문도 썼다. 그러나 나는 여러 관심분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의 전문성과 정체성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가장 관심이 있었던 한국근현대음악사 연구에 정착했다. 그것은 80년대 말 한국문화계의 키워드였던 '오늘', '이땅'의 움직임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일제시대는 내게 있어 거의 본능적인 흥밋거리였다. 왜 일제시대가 본능적인 흥밋거리였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지만, 이따금 3·1운동의 그 뜨거운 풍경이 아련히 떠오르는 점을 미루어, 아마도 나는 전생에 일본순사였거나 혹은 그에게 추격당하는 독립운동가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때 낭인(浪人)으로 떠돌 무렵, 조선우 선생님으로부터 한국음악사도 앞으로는 각론(各論)의 시대가 올 것이니 부산음악사를 연구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한국근현대음악사를 공부하고자 했던 나는 그동안 줄곧 전국구(全國區)를 생각했는데 부산이라는 지역구(地域區)를 갈아보라 하니, 처음에는 퍽 마땅찮았다. 어쨌든 스승의 말씀이니 조언에 귀 기울이며, 부산음악과 관련된 몇 편을 논문을 썼다.
그러는 동안 부산을 포함한 '지방'이 이른바 '중앙'에 신음하는 '주변'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고, 내가 사는 이 곳의 문화현상과 음악역사에 무게중심을 둠으로써 오늘날 한국사회에 팽배해 있는 왜곡된 구조관(構造觀)을 조금이나마 해체시켜야겠다는 사명감같은 것도 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보다 정확한 '오늘', '이땅'의 개념일지 모른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지역음악·지역음악사·지역음악가에 대한 관심이 그래서 싹튼 것이다.
이제 이 분야는 내가 행복한 글쓰기를 하기에 가장 안성맞춤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이것은 내 필생의 업이 될 것이고, 나는 매양 들풀처럼 이 작업을 수행해 나갈 참이다.
※ 소싯적에 쓴 글, 우연찮게 만났다. 예나 지금이나 열없기는 마찬가지. 이제 나는 레테의 강을 건널 수 없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