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금수현 선생을 기념하는 문화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여보려고 한다. 부산음악평론가협회와 음악풍경이 그 중심이 될 것이다. 금선생은 나와 여러 점에서 인연이 깊다. 첫째 그는 나와 출생지가 같다. 그는 강서구 대저1동, 나는 대저2동에서 태어났다. 둘째 그는 나와 같은 혈통이다. 둘다 김녕김씨 충의공파(金寧金氏 忠毅公派)다. 그는 26세손, 나는 28세손이다. 요컨대 우리는 지연·혈연으로 맺어진 인연이라고 할까. 고등학생 시절, 나는 여름방학 때가 되면 진해 안골음악촌을 찾아 그에게 인사를 드렸다. 항용 전혜금(全蕙金) 여사와 함께였다.
금수현, 그는 무엇보다 내가 활동하는 부산음악계의 파이오니어였다. 금수현 음악상 제정, 금수현 앙상블 조직, 금수현 음악콩쿠르 개최, 금수현 창작편곡음악제 개최 등의 사업을 통해 그를 기념하고자 한다. 강서구청이 함께 한다면 더욱 좋으리라. 내가 기념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를 기념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나이 오십줄에 접어들면서 들었던 터다. 2014. 3. 3 들풀처럼
금수현의 대표작 「그네」 노래비(사진출처: 국제신문)
초창기 부산음악문화의 개척자 금수현
김 창 욱
음악학박사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한 번 구르니 나무 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을 바람에 실어가네
'금수현' 하면 으레 떠오르는 노래가 바로 「그네」(1947)이다. 결이 고운 모시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처녀가 평화롭게 그네 타는 풍경을 그린 가곡이다. 전통적인 3박자에 향토색이 짙은 이 노래는 이미 중·고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노래가 담긴 레코드만도 20여 종이나 되는 한국인의 대표적인 애창곡이다.
그러나 금수현이 「그네」를 작곡했다는 사실은 그의 다대한 업적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70 평생동안 음악교육·음악행정·한글전용운동·음악보급운동·잡지발행 등 다방면에 걸쳐 비약적인 활동을 펼쳤던 그는 초창기 부산양악문화의 개척자로서, 나아가 한국양악계의 디딤돌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저보통학교에서 동양음악학교까지
금수현(金守賢)은 1919년 7월 22일, 대저동 사덕리에서 김녕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 26세손으로 태어났다. 정미업과 땅콩재배를 했던 아버지 김득천(金得千)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독실한 불교집안의 비교적 유복한 환경속에서 자란 그는, 초창기 양악가들이 기독교 문화를 통해 서양음악에 입문한 것과는 달리, 초등학교 학예회 때 담임선생의 칭찬에 크게 고무되어 음악을 하기로 결심했다.
대저보통학교 4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줄곧 담임을 맡았던 김두성(金斗星)은 당시 진주사범을 갓 나온 신참교사였는데, 오르간도 곧잘 타고 음악이론에도 밝아 금수현의 음악입문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특히 어린 금수현에게 음악적 감수성을 심어준 사람은 그간 생사여부조차 알 수 없었던 숙부였다. 어느날 그가 일본에서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것이 의외로 바이올린과 포터블 축음기였는데, 이를 통해 금수현은 매혹적인 바이올린 소리는 물론, 명창 이화중선의 판소리, 수심가·이별가, 일본 유행가 등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음악에 대한 불타는 그의 열정과는 달리, 그것을 천한 광대짓으로 여겼던 아버지는 금수현이 사업가나 금융가가 되기를 원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저버릴 수 없어 부산 제2상고(현재 부산상고)에 입학은 하였으나, 그 천한 광대의 꿈을 그로서는 쉽사리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를 설득시킨 그는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떠나 동양음악학교 본과에 성악전공(바리톤)으로 응시했는데, 9명의 응시자 가운데 한국인으로는 그가 유일한 합격자였다. 그가 이 학교를 지원한 것은 비록 희망했던 작곡과가 없었지만, 사립으로 꽤나 전통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까닭이었다. 궁핍한 일본 유학시절은 우유와 신문배달, 피아노 가정교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통해 겨우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졸업반 어느날, 그는 느닷없이 '일본에 오기 전 문화운동을 한 사상범'이라는 명목으로 붙잡혀 3개월 간 오오모리(大森) 경찰서 감방에서 지냈다. 문화운동이란 도일(渡日) 전 고향친구들과 조선의 농촌실태, 조선인의 희망, 문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에 관해 대화를 나눈 것, 금융조합 기관지에 농민해방을 그린 단편소설을 발표한 것 등을 말하는 것으로, 일본경찰은 이것을 문화운동이자 독립운동으로 여겼던 것이다.
감방에서 생활한지 두 달이 지난 어느날 밤, 갑자기 창문으로 쇼팽의 피아노곡 「군대 폴로네이즈」가 들려왔다. 이웃집 누군가가 라디오 볼륨을 올렸다가 옆에 경찰서 유치장이 있는 것을 깨닫고 낮추어 버린 모양이었다. 순간, 폴란드 독립군의 출정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그의 눈에는 어느새 이슬방울이 맺혔다. 여기서 그는 "아! 내가 다행히 풀려난다면 저런 곡을 써야지. 굳세게 영원히 음악에 몸바쳐야지. 음악의 신이여, 내게 그런 기회를 다시 한번 주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불온단체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판명되어 감방에서 풀려난 금수현은 졸업기념으로 「심봉사의 탄식」이라는 아리아를 작곡하고, 졸업 후 아사쿠사(淺草)의 국제극장 내 마츠다케(松竹) 오페라부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조선인의 창씨개명이 실시되었는데, 그는 호시 유메지(星夢二)라는 일본식 이름을 예명을 등록했다. 그러나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진으로 전운이 감돌 때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오페라단이 해체되고 그의 활동무대도 여의치 않았으므로 1941년 5월, 그는 마침내 조선으로 영구 귀국해 버렸다.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다
고향에 돌아온 금수현은 부산좌(지금의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갖고, 친구들과 노래극을 만들어 마산·삼천포·통영 등지를 순회했으며, 「강팔십」이라는 농촌계몽극을 써서 김해읍내에 나가 공연하기도 했다. 그러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취직부탁을 하다가 1942년 4월 동래고등여학교 음악교사로 자리를 잡았다. 동래고녀(현재 동래여고)는 호주 선교사가 설립한 동래 일신(日新)여학교의 후신(後身)으로 중일전쟁 이후 반일적이라 하여 폐쇄의 위기에 놓였다가 오태환(吳泰煥)·김명호(金明浩) 등 유지들에 의해 재건된 학교였다.
금수현은 이 학교에 재직할 무렵, 소설가 김말봉(金末峰 1901-1961)의 딸 전혜금(全蕙金)을 만나 1943년 10월 27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알고 보니 당시 전혜금은 동래고녀를 졸업하고 인천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의 제자였고, 김말봉은 그녀의 의붓어머니였다. 금수현의 대표작 「그네」(김말봉 시)는 이런 인연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금수현은 해방을 맞았다. 일본 천황의 항복소식이 전해지자, 동래의 중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금수현은 이 광경을 보고, 이럴 때 마땅히 부를 만한 노래가 없기 때문에 만세만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 이중희 교사에게 작시를 부탁하여 「새노래」를 작곡했다. "삼천리 강산에 새 빛이 트는 날"로 시작하는 4행 3절의 가사가 5음계의 선율에 붙여진 것이다. 이 노래는 멜로디만 손바닥만큼 작게 프린트하여 동래중학을 비롯한 부산의 여러 조선학교에 보내 이튿날부터 거리의 행진곡으로 부르게 했다.
해방이 되자, 금수현은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도위원회 문화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7살의 최연소 건준 도위원이 해야 할 첫 임무는 먼저 관악대와 혼성합창단을 만드는 일, 「독립」이라는 오페레타를 작사·작곡하여 연습하는 일, 그리고 UN군이 부산역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그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일이었다. 행렬은 그가 지휘자로 앞장서고 관악대와 합창단, 건준위원들과 시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부산역 광장에 도착한 200여명의 UN군은 그들을 환영하는 악대와 합창단에 거수경례를 표하고, 5만이 넘는 환영시민이 이 광경을 지켜 보았다. 지휘자로 나섰던 금수현은 이때 위대한 음악의 힘과 음악의 가치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금수현은 45년 10월 동래고녀에서 경남여고 교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2개월 전만 해도 자신은 일본말로 교육한 죄인이기 때문에 교육계에 복귀한다면 그들 앞에 나서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무렵 경남도 학무국장이자 신설된 부산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윤인구(尹仁駒, 부산대 초대총장)의 요청에 따라 「8월 15일」이라는 행진곡풍의 노래를 작곡했다. "죽음의 쇠사슬 풀리고 자유의 종소리 울린 날"로 시작되는 이것은 학생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행진곡풍의 노래로, 곧바로 프린트가 되어 전학교에 배포되었고, 부산방송국에서는 작곡자 자신이 매일같이 노래지도를 하면서 보급하니, 부산은 온통 '8월 15일'이었다. 술집 접대부들도 젓가락을 두드리며 이 노래를 부르니 손님들도 함께 부를 지경이었다.
한글전용론 제창
금수현은 음악가이면서도 남달리 한글전용을 옹호했다. 항고녀(港高女) 시절, 그는 먼저 자신의 이름인 김수현을 '금수현'으로 바꾸고, 갓 태어난 아들이름을 '금나라'로 지었으며, 이후에도 난새·노상·내리·누리 등 한결같이 한글이름을 지었다. 옛날부터 성을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죄악으로 여겼던 까닭에 이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김(金)은 '성김'이라고 하지만, '쇠금'이기도 하며, 시조인 알지(閼智)의 성이 신라 때는 금이었고 오행(五行)에도 김이 아니라 금이었던 사실을 그 신념의 근거로 삼고 옛 성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다. 또 항교녀가 경남여고로 이름이 바뀜에 따라 새로운 마크가 필요했으므로 그는 'ㄱㅕoㄴㅏㅁ'이라는 한글을 풀어 쓴 마크를 창안해서 학생들에게 달게 했다. 그는 나아가 악전책을 편찬하는데 음악용어를 '다섯줄', '높은 음자리표', '이음줄', '음표', '쉼표' 등과 같이 순한글로 바꿔 여러 학교에 프린트해서 배포하고, 당시 문교부 최현배 편수국장에게도 보냈다.
그는 또 한글연구자들의 모임인 '한글촉진회'에도 적극 참여, 연구발표회같은 모임에서 연설하는 기회도 갖게 되었으며, 대청동에 있던 미문화원 대강당에서 부산시민들을 대상으로 한글전용론을 펴 상당한 효과를 올린 적도 있었다. 1946년에는 문교부 음악용어제정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서는 가선(加線)을 덧줄, 강약을 셈여림, 종지를 마침, 소절을 마디 등 한글로 바꾸는데 기여했으며, 1955년에는 국회에서 논의됐던 '한글간소화방안'의 반대서명운동을 주도해 통영고교 교장으로 좌천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맞춤법이 어렵다고 소리나는대로 쓰라는 소위 한글간소화 담화는 당시 한글학자는 물론, 교육계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한글학자인 김법린 문교부장관이 사표를 내고 후임에 한글간소화를 하겠다는 이선근이 장관자리에 앉았는데, 한글간소화안을 성급하게 신문에 발표하는 등 혼미상태가 거듭되고 있었다. 그가 좌천된 이유는 이때 한글학회 회원이었던 금수현이 부산여중 이철우 교장과 한글간소화 반대건의서를 공동으로 작성하고 부산시내 고등학교 교장회의에서 모두 서명날인을 받은 혐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금수현의 한글전용에 대한 추진력만큼은 높이 평가돼, 이후 문교부 음악담당 편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1981년 외솔상을 수상했으며, 음악용어의 정리를 위해 『표준음악사전』을 펴내기도 했다.
경남음악협회 결성과 음악보급운동
금수현은 부산의 음악인과 음악교사들을 중심으로 1946년 '경남음악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교육음악부·성악부·기악부·작곡부 등 4부문으로 구성된 이 협회는 경남음악문화의 보급을 목적으로 조직된 것이었다. 협회의 주요 사업으로는 경남음악콩쿠르대회, 음악주보 발간 등인데, 그는 이를 통해 음악의 저변확대를 꾀했다.
1946년 제1회 경남음악콩쿠르대회가 경남여고 강당에서 열렸는데, 참가자는 주로 부산시내 학생들이었으나, 진해에서도 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콩쿠르는 해방이후 전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으로 경연대회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그 해 가을, 금수현은 문교부가 주최한 전국합창제에 경남여고 합창단을 이끌고 출전, 열광적인 반향을 이끌어 냈다.
이 무렵 경남여고는 합창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서울음대 주최의 전국음악콩쿠르에서는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는 경남여고 시절, 음악극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고구려 때 이야기를 바탕으로 「을불(乙弗)의 고생」과 해상왕 장보고 이야기를 토대로 「궁복의 딸」의 대본과 음악을 직접 썼다. 이후에도 그는 「피리와 칼」, 「삼손」, 「화목란」(花木蘭), 「페스탈로찌」 등의 음악극을 만들어 공연했다.
경남음악협회는 해방 후 첫 음악간행물인 '음악주보'(音樂週報)를 정기적으로 펴냈다. 8절지 1매(4면)을 프린트한 이것은 음악계의 주요 뉴스와 교재용 노래 1곡을 실어 부산과 경남의 각 학교에 배부됐다. 주보는 매월 3원의 유가지(有價紙)인데도 희망학생이 많아 매주 2천부를 찍어야 했다. 이 경험으로 금수현은 1951년에 대청동 4가 62번지에 새로이출판사를 차려 일반도서 및 악보출판을 시도했고, 1970년에는 음악잡지 『월간음악』을 창간, 92년까지 무려 22년 동안이나 발행해 냄으로써 척박했던 한국음악계의 디딤돌 역할을 했다. 또한 1947년에 금수현은 경남도립극장 극장장으로 취임, 한국의 쟁쟁한 음악가들을 불러와 매달 1회의 '희망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희망하면 누구나 무대에 설 수 있고, 곡목은 청중의 요청에 따라 조정되는 독특한 형태의 연주회였다. 그러나 순수예술공연장으로 운영했던 도립극장은 적자를 면할 수 없었던 터에, 도청에서는 흥행이 되는 쇼를 공연하라는 압력을 넣어 극장장직을 1년만에 사표를 내고, 아예 '새들예술원'이라는 음악극 공연단체를 새로 만드는 한편, 교단으로 복귀해 부산사범학교 교감이 되었다.
그는 1949년 1월, 음악인뿐만 아니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 '노래하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 모임에는 음악교사 조민하 외에 화가 우신출, 종교인 김희용 등 30여명이 참여했는데, 매월 쉬운 새노래를 만들어 미공보원에서 청중들과 함께 부르는 개창운동(皆唱運動)을 전개했다. 새노래는 주로 금수현과 윤이상이 작곡했고, 그 밖에 여러 작곡가들의 노래를 모집해서 부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그 이후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것은 공교롭게도 경남음악협회의 제5회 경남음악콩쿠르가 동광국교 강당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사상 유례가 없을만큼 많은 인원이 참가했던 음악콩쿠르는 잇따라 전해오는 전쟁소식에 본선을 치르지도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6·25가 이후 3년 1개월간 계속될 비참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에 걸쳐 대한민국의 심장부가 되었음은 물론, 피난민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김대현·김동진·김성태·김순애·나운영·윤용하·채동선·현제명 등의 음악가들이 대거 피난을 내려왔고, 많은 음악가들이 육군정훈악대·해군정훈악대·육군교향악단·경남경찰악대로 편입되었다. 당시 전선에서는 금수현의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고구려 산천은 영원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라는 가사의 노래가 즐겨 불려졌다. 이것은 그의 음악극 「을불의 고생」(1945)에 나오는 노래인데, 어느 군악대장이 음악극을 보고 이것을 채보(採譜)해서 퍼뜨렸다는 것이다.
이 무렵 그는 양성봉 지사의 제안으로 '향토문화회' 결성에 참여했다. 향토문화회는 그 첫 사업으로 이은상의 시 「낙동강」을 윤이상에게 작곡을 의뢰했는데, 이 노래는 당시 공전(空前)의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다. 낙동강 전투가 남북 서로간에 너무나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는 아픔을 호소하는 의미 외에도, 이것은 부산에 있어서 낙동강이 생명의 젖줄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후 1952년 금수현은 34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경남여중 교장으로 발탁되었고, 56년 2월에는 통영고 교장으로, 57년에는 문교부 편수관으로 6년간 근무하게 된다. 편수관은 각급학교 교육과정을 정하고 국정교과서의 편찬, 검인정교과서의 검열 등이 주요 업무였다. 이 시기 금수현은 중앙청 공무원으로서 유일한 음악가였던 터라, 많은 지인들이 청탁차 그를 찾았다.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뉴욕으로 유학을 떠날 때 3급 이상 공무원의 귀국보증이 필요했기 때문에, 작곡가 윤이상은 파리 유학을 떠날 때 여비가 급하므로 자신의 한옥을 담보로 돈을 빌리려고, 작곡가 김성태는 서울음대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할 때 최종출신교인 동경고등음악학교가 총무처의 공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테너 고태국도 부산교육대학 교수가 되려는데 학력을 공인받지 못했던 등의 이유로 잇따라 그를 방문했던 것이다. 그는 총무처로 찾아가 교육공무원법을 검토하고, 광복전 연희·보성·이화전문학교가 조선총독부에서 전문학교 인정을 못받고 있음을 발견했다. 일본의 음악학교도 마찬가지라는 판단을 내린 그는 국내외의 주요한 학교들을 골라 총무처에 통보함으로써 이후 음악교수들의 임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왔다.
한편, 1960년 4·19가 지나고, 61년 5·16이 일어난 얼마 뒤 금수현은 부산사범시절 김홍진이라는 제자의 중계로 박정희 군부정권의 중앙정보부 행정이사관 시사정보실장에 발탁되었다. 시사정보실장의 주된 임무는 국민의 동태를 파악한 자료 가운데 중요한 것을 간추려 일일보고서를 작성, 김부장의 명의로 박의장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중정의 기관지 『양지』(陽地)의 발행일을 맡기도 했는데, 공화당이 조직되고 나서는 중앙상임위원이 되어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 처참하게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이것은 그의 일생일대의 외도(外道)이자, 실패작이었다.
1963년부터 65년까지 금수현은 국제신보 고문을 맡아 '거리의 표정'이라는 칼럼을 썼고, 이를 모아 『거리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묶었다. 또 65년 '영 필하모니관현악단' 이사장직을 맡았고, 68년 금잔디유치원을 설립했으며, 70년에는 『월간음악』을 창간했다. 그리고 72년 음악저작권협회 회장, 82년 한국작곡가협회 회장, 82년 한성로터리클럽 회장 등을 지냈던 그는 필생의 작품인 오페라 「장보고」(張保皐)를 3여년의 각고 끝에 완성하고, 당뇨합병증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92년 8월 31일,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악가로 악계에 첫발을 내디딘 금수현은, 이후 동래여고·경남여고·부산사범학교·통영고교에서 교육자로서 눈부신 활동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작곡가로서, 행정관료로서, 극장 경영자로서, 언론인으로서, 유치원 설립자로서, 악단 책임자로서, 잡지 발행인으로서, 음악협회 회장으로서 다양하고 폭넓은 활약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1941년부터 1956년까지 십 수년동안 척박한 도시 부산에 음악의 씨를 뿌린 초창기 부산양악문화의 개척자임에 틀림없다. 경남음악협회 조직, 음악주보 발간, 노래하자회 결성, 음악경연대회 개최, 가곡과 음악극의 창작 및 공연, 합창운동과 개창운동 등의 다대한 활동은 당대 부산음악문화를 싹 틔우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던 까닭이다.
『부산인물사』(선인,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