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윤현주 논설위원(부산일보)께서 처녀시집을 냈다. 『맨발의 기억력』(산지니, 2017)이라는 타이틀이다. 총 4부로 구성된 시집에는 68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인으로 데뷔한 후 4년 간의 산고 끝에 맺은 첫 결실이다. 수확의 기쁨을 음악계 말석을 지키고 앉은 내게까지 나눠주시다니, 감읍하기 이를데 없다.
'맨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청춘', 혹은 '열정'일 법한데, 표제작 「맨발의 기억력」은 그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더구나 '맨발'이 '기억'을 할 수 있다니, 혹은 '맨발'이 '기억력'을 갖고 있다니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맨발에 새겨진 부끄러움 몇 짐", "맨발의 기억력은 / 머리보다 가슴보다 오래" 간다는 구절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문득 박목월의 「가정」이라는 시와 오버랩되기도 했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도 없지 않았을 테지. 2017. 8. 26 들풀처럼.
윤현주 시인의 처녀시집 『맨발의 기억력』 표지.
『맨발의 기억력』 속지에 새겨진 내 이름. 시인의 친필이 오똑하다.
지상에는
아홉 컬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컬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과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 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박목월, 「가정」(家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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