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난파연보공동연구위원회 편, '새로 쓴 난파 홍영후 연보'(한국음악협회경기도지회․민족문제연구소, 2006)
김 창 욱
홍난파(洪蘭坡, 본명 洪永厚 1898-1941)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음악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그는 작곡․평론․음악교육․지휘․방송․레코드 분야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그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서양음악가, 나아가 한국 근대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예술가로 평가된다.
비록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홍난파의 활동과 업적은 실로 지대한 것이어서 그에 대한 연구는 한 음악가 개인의 연구라는 의미를 뛰어넘어 한국 근대음악사의 커다란 줄기, 즉 일제강점기 서양음악의 변천과정을 연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홍난파의 경우, 그의 음악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에 비해, 오히려 그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많았다. 즉 그가 민족음악가냐, 친일음악가냐고 하는 ‘논란’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적 쟁점을 이루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홍난파의 음악 및 사회활동에 대한 자료집이 출판되어 눈길을 끈다. 한국음악협회 경기도지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으로 펴낸 '새로 쓴 난파 홍영후 연보'(난파연보공동연구위원회 편)가 그것이다. 특히 이것은 홍난파에 대해 민족음악가와 친일음악가라는 양극적 평가를 내렸던 두 단체가 함께 참여해서 얻은 결과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난파연보공동연구위원회(이하 ‘위원회’라 줄임)의 이 작업은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실증적이다. 그것은 연구자의 주관적 관점이나 검증이 어려운 사실이 제외됨을 뜻한다. “자료를 통해 확인된 사실만 수록”하고, 설령 알려진 행적이라 하더라도 “1․2차 자료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은 제외”한다는 원칙과 기준의 설정이 그러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또한 위원회의 주된 작업내용은 홍난파의 모든 행적을 기록하고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위원회는 난파의 자필기록은 물론, 1차 자료에 해당되는 원문과 원본을 확인하고 신문․잡지의 경우 면수와 학적까지 일일이 조회했다. 더우기 그의 음악과 사회활동이 ‘친일’이든 ‘반일’이든 그 내용이 사실로 입증되면 모두 수록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마땅히 이후 홍난파 연구를 위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자료집이라 할 만하다.
홍난파의 전 생애가 담긴 이 자료집은 크게 4갈래로 이루어져 있다. Ⅰ. 서양음악과의 만남, Ⅱ. 바이올린으로 노래한 ‘애수의 조선’, Ⅲ. ‘고향의 봄’으로 꽃피운 음악활동, Ⅳ. ‘희망의 아침’과 ‘정원의 실패’가 그것이다.
<서양음악과의 만남>에서는 1898년 홍난파의 출생부터 일본 동경음악학교 유학까지의 사실을 다루고 있고, <바이올린으로 노래한 ‘애수의 조선’>에서는 1919년 조선으로 귀국한 홍난파가 다시 일본 동경고등음악학원에 유학, 졸업하기까지의 사실을 담고 있다. 또한 <‘고향의 봄’으로 꽃피운 음악활동>에서는 1929년 경성 중앙보육학교 음악교유 취임에서부터 미국 셔우드 음악학교 유학, 빅타축음기주식회사 경성지점 음악주임 및 이화여전 음악과 강사 취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사실을 포함한다. 끝으로 <‘희망의 아침’과 ‘정원의 실패’>에서는 1937년 조선문예회로부터 시작된 친일활동과 때이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홍난파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밝혀냈다. 홍난파의 출생일자가 잘못되었다는 사실, 「봉숭아」 발표연도가 수정되었다는 사실, 「과학의 노래」가 새로 발굴되었다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특히 위원회가 이번 작업에서 홍난파의 동경음악학교 예과를 수료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에 관해서는 신문․잡지는 물론, 자필이력서에서도 이미 기재된 바 있으나, 공식문서를 통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책의 말미에 실린 부록 <홍난파의 음악작품 목록>은 지금까지 나온 어떤 자료보다도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평자는 다음 몇 가지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홍난파의 행적 가운데 주요한 쟁점이 되고 있는 동경음악학교 중퇴와 3․1운동의 관련성 여부, 둘째 홍난파의 친일활동이 자의에 따른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 하는 문제, 셋째 본문 중의 홍난파 글을 싣는 경우와 빼는 경우의 기준 문제, 넷째 홍난파 작품목록에 추가되어야 할 사항 등이 그것이다.
첫째 홍난파의 동경음악학교 중퇴와 3․1운동의 관련성 해명은 당시 그가 민족운동에 관여했는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와 상관된다. 이에 대해서는 홍난파 자신의 글은 물론, 나운영의 메모, 음악가로서는 유일하게 조선광문회 회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 등 자료의 제시가 필요하다.
둘째 홍난파의 친일활동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활동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히 구명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홍난파의 사상전향서 “思想轉向に就いての論文”(京鍾警高秘 제14868호)는 물론, 그것이 씌어지게 된 배경에 대한 자료 제시도 아울러 필요하다.
셋째 본문 가운데 홍난파 관련글을 싣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가 일정한 기준에 의한 것임을 밝힐 필요가 있다. 음악회와 관련된 많은 기사의 게재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삶과 관련된 글이나, 그의 음악관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가 실리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넷째 홍난파 작품목록에 빠진 부분이 없지 않다. 1930년대 천도교(天道敎)의 이돈화(李敦化)가 '용담유사'(龍潭遺詞)에서 가사를 발췌하고, 이를 홍난파에게 의뢰해서 만든 노래 12곡이 그것이다. 이들은 이후 작품목록 정리에서 추가를 필요로 한다. 이 자료집이 홍난파와 그의 음악연구에 다대한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음악사학보' 제36집(서울: 한국음악사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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