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8
[인터뷰]
“서양과 달리 국내 대학의 음악교육은 실기 중심…교수들 연구 게을리해”
논문만 200여편 한국음악사 연구 독보적 존재 손태룡 음악문헌학회장
▲ 손태룡 한국음악문헌학회장이 대구 성광고 음악과 준비실에서 인터뷰를 하던 중 자신의 저서 앞에서 카메라를 보며 웃음을 짓고 있다.
토마스 칼라일은 ‘역사는 모든 과학의 기초’라고 했다. 모든 학문에 있어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음악하면 으레 작곡이나 연주, 성악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음악에는 이들 외에 ‘음악학’이란 장르가 있다. 음악학은 음악의 기초학문으로, 철학·역사학·물리학·생리학·심리학 등 여러 학문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음악사학, 음악미학, 음향학, 비교음악학 등이 포함된다.
손태룡 한국음악문헌학회 회장(60). 그는 한국음악사 연구에 지대한 성과를 남긴 음악학자다. 음악평론가 김창욱씨는 손 회장에 대해 “야산을 일궈 옥토를 만드는 개척자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 라고 극찬했다. 그는 ‘한국의 전통악기’ ‘사진으로 읽는 음악사’등 지금까지 9권 이상의 단행본을 출간했으며, 총 24권의 음악전문연구서를 펴냈다. 아울러 한국음악사에 관련한 논문을 200여편이나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실기위주의 기능적인 면이 우대받는 음악계에서 지역의 음악학을 정리해 체계화시킨 독보적인 존재다. 고교 교사로서 웬만한 대학교수보다 훨씬 더 큰 학문적 성과를 이뤄낸 비결이 뭘까.
지난달 31일 오후 대구 성광고 음악준비실에서 그를 만났다. 서재에 가득한 책과 2대의 기타가 기자를 반겼다. 밝고, 화사한 미소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 한국음악문헌학회는 어떤 학회인가.
“2008년 부산의 김창욱(음악사), 대전의 문옥배, 대구의 이혁우(종교음악), 최영애(서양음악사) 등과 만든 학회다. 대구를 중심으로 향토와 관련한 음악학을 연구하는 단체로 보면 된다. 현재 회원은 28명이다. 대구지역 최초로 합창단을 조직한 박태원과 그의 동생 박태준, 현제명과 김문보 등에 대한 각종 자료와 사진을 발굴했다. 1년에 한번 음악관련 저널을 발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3권의 논문집을 냈다. 회원들이 다들 생업에 바빠 연구에 집중할 여력이 없는 형편이지만 한국, 특히 대구음악의 발전을 위해 누군가는 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시작했다.”
- 어떻게 자료를 수집하고 있나.
“지금이야 인터넷이 있어 훨씬 수월하다. 그러나 그것은 믿을 수 없다. 사람이 언제 태어나서 살다 죽었다는 사실, 즉 인물의 생몰(生歿)연대와 연보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건 기초자료인데 대개 소홀히 취급한다. 영남일보를 비롯한 지역신문사, 잡지사는 물론 대학도서관 등을 일일이 방문해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했다. 자료는 완벽한 게 아니라 항상 오류를 내포하고 있어 글을 쓰면서 늘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거친다. 성악가가 감기에 걸려 공연을 망칠 때도 있지 않은가. 연구자도 컨디션에 따라 실수할 수 있다.”
- ‘한국전통음악가연구’ 같은 저서는 대단히 방대한 작업을 기초로 했다. 에피소드는 없었나. 힘들었을 텐데.
“밝혀지지 않은 대구출신 음악가의 호적을 조사하기 위해 중구청을 찾아 호적등본을 신청했다. 하지만 작고한 지 오래돼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먼지가 수북이 쌓인 호적창고 출입을 허락받아 꼬박 한달을 뒤진 끝에 모두 찾았다. 작업이 끝나면 벼룩에 물렸는지 온몸이 근질근질해 매일 목욕탕에 갔다. 또 채권가방 같은 걸 들고 한 초등학교에 들러 인터뷰를 하려다 책장사로 오해를 받아 교무실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신문사 조사실에서 오랜 기간 음악기사색인 작업을 하다 시력이 매우 나빠졌다.”
- 음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우리가 흔히 음악이라 하는 서양음악은 유럽 여러 나라의 민족음악이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독일음악이고, 푸치니의 음악은 분명 이탈리아음악이다. 그런데 이들 음악을 서양음악으로 함께 보는 까닭은 오랫동안 서로 교류했기 때문이다. 서양음악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다만 그것을 즐기는데 그쳐야 한다. 서구의 음악만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민족음악이 진정한 음악으로 통용돼야 한다.”
- ‘한국의 전통악기’란 책을 펴냈다. 세계의 여러 악기 가운데 전통악기는 어떻게 자리매김되고 있는가.
“악기는 음악을 표출하고자 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구다. 먼저 그 음악의 특질을 파악하지 않고는 악기의 구조적인 특징을 잘 알기 힘들다. 지금껏 세계악기사(史)에서 무시되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전통악기의 전파과정에 대해 소개하고 악기형태, 연주능력을 비롯한 서양악기와 유사점을 비교하고자 했다.”
- 대구시사(市史)와 경상도 7백년사 집필위원을 역임했다. 향토음악사에 천착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35세 때 영남대 대학원에서 송방송 선생에게 사사하고 그분이 주도한 한국음악사학회에 가입하고 나서부터다. 학회지를 연 2회 발간하는데 편집장을 15년간 했다. 그런데 한국음악사가 곧 서울음악사란 걸 알게 됐다. 다시 말하면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한 음악사 연구란 말이다. 대구토박이가 한국음악사 전반을 연구하는 것보다 ‘가까운 데서 깊고, 좁게’ 연구하고 싶어 대구음악사에 귀착하게 됐다. 그게 1990년대 초였는데 20년 가까이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 대구음악사는 어떠한가.
“지금은 아닐 수도 있지만, 대구는 일제강점기 예술의 수도였다. 음악의 경우 박태원, 박태준, 현제명, 김문보, 추애경 등 기라성 같은 음악인들이 있었다. ‘나리~나리~ 개나리’를 작곡한 안동의 권태호도 위대한 음악가다.”
- 음악계에도 대구 등 지방에 대한 차별 같은 게 있나.
“서울지역의 두 방송국에서 특집기획으로 각각 작곡가 박태준에 대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한 적이 있다. 박태준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으니 담당 PD가 박태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나를 인터뷰했다. 박태준이 활동한 주무대가 대구여서 대구를 강조했더니 PD가 대구는 줄이고 서울과 연관된 것을 부풀려 프로그램을 만들었더라. 전국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이라서 방송국 사정이야 이해는 했지만 씁쓸했다.”
- 대구음악사를 전공해서 그런지 지역에 대한 애정이 많은 것 같다.
“대구사람이 대구 것을 모르면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자기가 태어난 지역과 조상을 먼저 알고 나라와 민족을 논했으면 한다. 우리 사회는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모든 면에서 서울중심이다. 그런 가운데 대구를 이야기하면 독립군이나 다를 바 없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대구엔 박태원·추애경·현제명 등
기라성 같은 음악인 많았는데…
한국음악사란 게 서울음악사더라
서울 두 방송사와 인터뷰하면서
박태준의 대구활동 강조했더니
서울 얘기만 부풀려 방영하더라
2008년에 음악문헌학회 만들어
향토 관련 음악학 연구에 집중…
유명 작곡가 귀중자료 다수 발굴
기생·기생단체 국악에 큰 기여
먼지 수북 호적창고 한달 뒤지다
온몸 근질근질 매일 목욕탕 가
- 2002년 대구기생의 음악사적 고찰이란 논문을 냈다. 어떤 계기로 기생을 연구하게 됐나.
“음악학을 연구하다보면 다른 예술사도 함께 공부하게 된다. 음악학에는 서양음악은 물론 국악, 종교음악 등 여러 분야가 있다. 국악을 알려면 국사를 알아야 하고, 종교음악을 제대로 알려면 종교사도 알아야 한다. 대구국악사를 연구하다 기생과 기생단체가 국악에 큰 기여를 했다는 걸 알았다.”
- 음악학 연구자로서 보람이 있다면.
“‘박태준 악곡연구’가 곧 탈고된다. 대구가 낳은 박태준을 널리 알려 박태준기념사업회가 생기고 오페라 ‘청라언덕’으로 제작돼 공연되기도 했다. 작곡가 권태호를 발굴해 재조명함으로써 안동시가 그의 기념관건립에 나섰다. 음악인으로 인문학분야에서 대구시문화상, 금복문화예술상을 수상한 게 영광이다. 무엇보다 내가 펴낸 몇몇 책들이 우수학술도서로 지정돼 음악을 지망하거나 전공하는 사람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많이 읽힌다는 게 더 기쁘다.”
- 클라리넷을 했다고 들었다. 어떤 계기로 클라리넷을 전공하게 됐나.
“클라리넷은 바이올린과 같은 기초선율악기다. 클라리넷을 하면 색소폰과 같은 악기도 쉽게 연주할 수 있다. 고교 시절 음악선생님의 권유로 클라리넷을 했는데 3학년 때 전국 콩쿠르대회에서 문교부장관상을 받았다. 서울음대 입학을 보증하는 큰 상이었는데, 서울로 갈까 영남대로 갈까 고민하다 4년 전액장학금에다 교통비까지 줬던 천마장학생으로 영남대에 진학했다.(웃음) 대구에선 클라리넷을 배울 스승이 없어 4년간 일주일에 한번 서울에 가서 임현식 선생으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 클라리넷 연주자에서 음악학 전공자가 됐다. 전환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서울에는 실력 있는 연주자가 많더라.(웃음) 물론 그들과 끝까지 경쟁할 수도 있었지만 연주자로서 성공하기보다 음악이란 학문을 하고 싶었다. 대학 때부터 질문을 많이 하기로 유명했다. 호기심이 많았던 거지. 연세대 대학원에 진학해 이론공부에 천착했다. 졸업 후 모교(성광고)에서 브라스밴드 지도교사가 필요하다는 제의가 있었고, 대구로 귀향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여러 대학에 출강했다. 지금은 출강하지 않고 연구와 집필에 집중하고 있다.”
- ‘서울로 갈 걸’ 또는 ‘대학 교수로 갈 걸’하는 후회는 없었나.
“뒤돌아보면 아쉬운 게 없을 수 있나. 섭섭했을 때도 있지만 후회는 없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성취한다. 진정한 지식인은 자리에 연연하기보다 사회에 어떻게 기여하고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숙성되고 익어가는 걸 느낀다. 지금은 진한 국물이 됐다. 하하하.”
-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은 어떤가.
“예·체능교육, 특히 음악은 청소년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학교교육이 사회와 분리돼 사회에 쓰이지 않는 게 문제다. 특히 입시위주 교육제도 아래에선 더 그렇다. 음악을 비롯한 예·체능 시간이 단축됐다. 다들 인지하고, 누차 이야기하지만 예능교육이 강화돼야 한다. 또 서양의 경우 대학의 음악교육은 음악실기 중심, 음악학문 중심, 음악교육 중심으로 나뉘어 있는데 우리는 거의 다 실기 중심이다. 또 교수가 되면 자리에 안착해 연구를 게을리하는 측면이 있다. 예능과 교수가 논문을 쓰는 것보다 연주나 전시 등 실기에 몰두하다보니 그런 것 같다.”
- 인생의 멘토가 있다면.
“송방송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와 임우상 계명대 명예교수를 꼽고 싶다. 특히 송 교수님은 혹독하게 논문지도를 하면서 나를 단련시켰다. 지나고 보니 당시엔 힘들었는데 그게 다 보약이더라.”
손태룡
△ 1975년 - 영남대 문리대 기악과(클라리넷) 졸업
△ 77년 - 연세대 대학원(음악교육학) 졸업
△ 90년 - 영남대 대학원(한국음악학) 졸업
△ 91~94년 - 대구시사(市史) 집필위원
△ 94년 - 금복문화예술상 수상
△ 97~2000년 - 경상도7백년사 집필위원
△ 2011년 - 대구시문화상 수상
△ 현재 - 대구 성광고 음악교사, 한국음악문헌학회 대표, <사>대구경북향토문화연구소 편집위원, 한국음악사학회 편집장
△ 저서 - 음악관련 9권의 단행본과 24권의 전문연구서 발간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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