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피는 봄날이다. 오늘, 나는
전명숙 시인께서 보내주신 시집 한 권을 받았다.
'전갈'(해성, 2012)이라는 제목이다.
스캔 바이 들풀처럼. 시집 표지.
스캔 바이 들풀처럼. 내 이름이 선명한 시인의 친필.
받자마자 몇 편을 읽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해독(解讀)이 쉽지 않다. 여전히 알듯말듯, 긴가민가다. 예컨대 표제시 '전갈'도 그랬다. 이를 일러, 쉬르리얼리즘(surrealism)이라고 했던가?
봉함된 편지를 받았다비린내가 훅 끼쳤다
아무리해도 아물지 않는 상처에서 풍기는, 아직도
생생한 선지,
국을 먹고 있을 때였다
혼자 먹던 국그릇에 뚝! 떨어지는 한 방울의
독,
그의 전갈
치명적인 시간들로 그득한 사막에서
비틀거리는 발자국을 고스란히 담아 보낸
편지
낯익은 글씨와 모르는 사막의 소인이 찍힌 그, 것을
차마 열어 볼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주르륵,
흐를지도 모르는 모래알 섞인 그의 전갈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밤이 깊도록
봉투 속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울었다
자,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나는 이 시를 읽고, 우선 '전갈'이 동음이어(同音異語)의 중의어(重意語)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즉 '전갈'은 '전갈'(全蠍, scorpion, 전갈목에 속한 절지동물)이기도 하지만, '전갈'(傳喝, 어떤 말을 전하거나 안부를 물음)을 뜻하기도 한다.
전자의 '전갈'이라 했을 때 그것은 시에서 "한 방울의 독"이자, "봉투 속 부스럭거리는 소리"의 주체가 되며, 후자의 '전갈'일 경우 그것은 "비틀거리는 발자국을 고스란히 담아 보낸 편지"이자, "자칫하면 주르륵, 흐를지도 모르는 모래알 섞인" 소식을 의미한다.
시를 읽으며, 나는 문득 열사(熱沙)의 땅 중동으로 떠난 노동자와 그를 떠나보낸 아내를 떠올렸다. 곧 가장인 남편은 사우디로 돈을 벌러 떠났고,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는 아이들을 뒷바라지하고 가정을 지키면서 남편을 그리워한다.
어느날, 아내가 봉함된 편지를 한 통 받는다. 남편의 편지다.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받은 남편의 편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린내가 훅 끼"칠 만큼 신선하다. 편지를 손에 쥐고 "혼자"서 "국을 먹"던 아내는 마침내 목이 메이고 급기야 "국그릇에 뚝!" 눈물을 떨어뜨린다. 그것은 "사막에서 비틀거리는" 남편의 "발자국을 고스란히 담아 보낸 (모래알 섞인) 편지"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치명적인 시간들로 그득한 사막"의 "전갈"은 가혹한 사막에서 노동에 시달리는 남편이며, "전갈"이 뿜어내는 "독"은 남편이 토해 내는 숨 막히고 거친 숨소리가 아니던가!
그러나 "낯익은 (남편의) 글씨"가 씌어진 봉투를 아내는 쉬이 뜯지 못한다. "자칫하면 주르륵" 눈물이 흐를지도 모르기 때문에 "차마 열어볼 수가 없었"고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갈"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밤이 깊도록" "봉투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것은 이국(異國)에서 밤새도록 노동하는 남편의 고력(苦力)이자, 가정을 먹여 살리려는 가장으로서의 생존의 몸부림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던 아내는 끝내 속울음을 울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어떤가? 이상은 물론 망구 내 해석이다. 음악평론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문학평론까지? 그러나 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오히려 그 속에 내재된 묘(妙)한 매력(魅力)을 더욱 증폭시킬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 또한 쉬르리얼리즘의 매력이기도 하겠고... 에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