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날들 601

어리석은 여행자

김수우 시인께서 자작 산문집 '어리석은 여행자'(호밀밭, 2021)를 보내주셨다. 책자(冊子)가 가볍다. 시(詩)보다 간결한 까닭에 그다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감사의 마음으로 열심히 읽어 볼 참이다. 한편 김 시인의 '눌'(訥)이 최삼화 작곡가의 선율에 얹혀, 오는 11월 짜장콘서트 무대에 올려질 예정이다(6일 동아대석당박물관). 부산 초연이자, 대한민국 초연이며, 세계 초연이 되는 셈이다. 2021. 5. 6 들풀처럼 잎진 자리마다 돋은 겨울눈 풀거미집에 쪽문을 다는 봄안개 다 내 안의 말들입니다 말을 안에 넣어두니 하늘이 조용합니다 그대에게 닿지 못한 말은 그냥 소리라 어제의 인사는 그대 안에 다다를 때까지 빗살무늬를 긋는 바람일 뿐 그립습니다, 한 생각 수천 리를 돌아 그대에게 닿고서..

아름다운 날들 2021.05.06

제석골 투어

바야흐로 뒷산산악회를 가동하다. 산악회 멤버는 단 둘. 내가 회장이고, 이뿐이가 총무다. 굽이굽이 삼나무 숲길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걷기에 제격이다. 그러나 승학산 입구에서 산중턱 문화마루터와 자갈마당을 지나 서구 꽃마을로 넘어가기에는 아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편도 3시간, 거의 반나절은 잡아야 한다. 그리하여 왕복 2시간 정도 소요되는, 일상적인 산책을 위한 표준 코스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다음과 같다. 1. 우리집(우림아파트)에서 출발 → 마을버스 2, 혹은 2-1번 종점(20분 소요) 2. 마을버스 종점 → 제석골 계곡 → 부산일과학고등학교(15분 소요) 3. 과학고등학교 → 문화마루터와 장수천 분기점(15분 소요) 4. 장수천 분기점 → 장수천(10분 소요) 요컨대 집에서 목적지 장..

아름다운 날들 2021.04.30

올해 운세

올해가 신축년(辛丑年)이라지? 소는 소이로되, '흰 소'의 해라는데 나는 여지껏 그런 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내가 몰이를 하고, 여물을 먹였던 소는 언제나 황소였네. 커다란 눈망울은 마냥 선량했고, 행실은 늘 착실하고 순종적이었지. 새벽부터 밤까지 좀처럼 쉴 틈이 없었던 소, 경운기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소는 정말 소처럼 일만 했지. 각설하고, 소암(素庵) 스님께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신수를 봐 주시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꽃 피고 새 우는데, 무엇이 더 필요한가, 다. 그러나 그리 호사를 누린 기억이 없으니, 아마 올해도 그럴 테지. 그럼에도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 '나쁘다'보다 '좋다'는 것이 좋은 거다. 손가락이 가는 한 인간에게는 그런 말씀이 더없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2021. ..

아름다운 날들 2021.03.09

송방송 스승 자서전

송방송 스승님께서 자서전 '음악학자 일해(一海)의 학문인생'(연낙재, 2021)을 보내주셨다. 무엇보다 두껍다. 그리고 무겁다. 하드 커버에 무려 750쪽에 이르는 분량이니 그럴 만도 하다. 언제나 꼼꼼하신 스승님이시니 으레 '찾아보기'(색인)도 빈틈이 없다. 거기에는 내 이름도 오롯이 올라 앉아 있다. 가리키는대로 741쪽을 따라가 보았더니, 소싯적 영남대학교 사숙시절에 읽었던 '풍정도감의궤' 이야기와 당시 함께 놀았던 국악과 학생들의 이름도 보인다. 젊은 한때의 새삼스런 추억이다. 베개 삼기에 딱 알맞는 규격, 그나저나 언제 다 읽는다? 2021. 2. 28 들풀처럼 * 의궤(儀軌)란,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행사가 끝난 후에 준비과정, 의식절차, 진행, 행사, 논공행상 등에 관해 기록한 책 * 풍정도..

아름다운 날들 2021.02.28

봄이 온다

입춘(立春)도 지났으니, 마침내 봄이 왔다고 말할 수 있겠지. 봄은 여울 물소리와 더불어 오기도 하고, 버들잎의 가느다란 정맥(靜脈)을 따라 걸음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봄은 쭉 뻗은 고양이의 콧수염 끝에서 전해 오기도 하리라. 고양이의 털은 미인의 귀밑머리보다 가볍고 보드라우며, 호동그라니 투명한 눈알 속에는 여릿여릿 아지랑이가 피고 있는 중이다. 2021. 2. 12 들풀처럼

아름다운 날들 2021.02.12

봉투

맏딸 다슬이는 대학 3학년. 신학기 장학금을 탔다. 등록금은 총 3,117,000원. 그 가운데 장학금이 2,350,000원. 그러니 실제 내야 할 돈은 767,000원. 여기에 교수 추천 장학금 40만원. 게다가 학기당 3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오른 학교 기숙사에도 들어가게 되었단다. 엊저녁 밥상머리에 앉자 줄 선물이 있단다. 건넨 봉투, 펼치자마자 부챗살처럼 퍼지는 지폐, 지폐들. 문득 살맛이 났다. 2021. 2. 11 들풀처럼

아름다운 날들 2021.02.11

소싯적 시

이별 파도 높은 만경창파(萬頃蒼波) 저 편 강기슭으로 떠나는 배 뱃머리에 펄럭이는 흰 옷자락 바람에 흩날리는 목소리 이별이란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 풍경에서 겨울 문턱에 다다랐을 즈음, 가을은 저만치서 고추잠자리를 날리고 있었다. 강물 따라 하류(下流)로 흐를꺼나 지난 겨울 잃어버린 지연(紙鳶)을 찾으러 풍경같은 마을마다 빈 가지에 열린 노을은 저녁햇살에 익어가는 능금 겨울행 겨울을 걷는다 살얼음의 강(江)을 건너듯 아내의 수술(手術)은 끝났을까 눈이 맑은 아이의 얼굴이 웃는다 흔들린다 병원(病院)을 나서며 걷는 서툰 남편(男便)의 보행(步行) 봄은 아득히 먼데, 무심코 바라보는 분만(分娩)의 가지 끝에서 모람모람 내리는 눈 울 아부지 나는 아부지한테 나쁜 소리 들어 본 적..

아름다운 날들 2021.01.22